2024년 초가을, 드디어 진짜 가을 시작
얼마 전 연금 복권과 로또가 동시에 당첨된 사람의 기사를 읽었다. 정말 사무치게 부러웠다. 나는 대체로 복권을 잘 사지 않는데 뽑기 운이 정말 없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성공했던 뽑기는 바로 내 동거인 H다. 마치 1+1 상품처럼 동거인은 자신의 보석함에서 기꺼이 다양한 친구들을 내어주었다.
나의 친구 없음의 역사는 유구한데 이건 오로지 내 탓이다. 마음의 문을 여는 듯 열지 않는 함께 있는 걸 좋아하는 듯 혼자 있음을 선호하는 나는 애초에 모임이나 행사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에이~친구 많은 사람들이 괜히 이런 말을 하더라.’내지는 ‘저도 친구 없어요.’라는 반응을 보이곤 하는데. 난 정말 친구가 없었다. (없다고요. 아니 없다니까요!) 전에 만나던 사람 중 하나는 내게 충고랍시고 ‘그렇게 혼자 늙으면 외롭다.’라고 조언까지 해 줄 정도였으니까. (아니, 근데 그렇게 걱정되면 친구를 만들어 주던가. 지도 친구 없으면서) 나도 슬슬 ‘정말 이러다가 100세 인생 시대에 혼자 늙어 죽는 거 아니야?’라는 걱정이 들 때쯤 동거인 H의 보석함을 열게 되었다.
내가 보석함에서 운명처럼 발굴한 첫 번째 사람은 동거인의 전 회사 동료 S였다. 한 카페에서 처음 보게 된 S는 어딘가 진중한 모습에 살짝 짓는 웃음이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나와 정말 닮은 구석이 많았다. 전시회, 음악감상 그리고 독서를 좋아하는 성격에 배려심과 착실함을 두루두루 갖춘 S와 대화를 나눌 때면 정말 ‘잘 맞는 친구와의 교감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느꼈다. 다정다감하고 조용한 성격의 S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라고 이 문단을 끝맺을 수도 있겠지만 S는 묘하게 웃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가진 카드의 숫자를 조합해 1위를 한 사람이 ‘왕’이 되는 달무티라는 게임을 S와 함께 한 적이 있는데 S는 굉장한 재능을 보였다. S는 첫 판부터 초고속으로 왕이 되었다. 평소 조용한 성격의 S가 왕이 되면 ‘성군이 되겠군.’이라고 생각한 찰나 S는 내게 “어허! 머리를 조아리거라.”라고 호통을 쳤다. 아뿔싸, S는 성군과 정반대의 폭군이었고 S는 게임이 거듭될수록 민심을 잃어갔다. 나는 옆자리의 친구에게 조용히 말했다.
“S를 탄핵해야 할 것 같은데. 난 불가촉천민이니까 평민인 네가 어떻게 해 봐.”
“평민이라고 무슨 힘이 있는 줄 알아? 그리고 천민인데 함부로 말 걸지 말아 줄래.”
S는 달무티에 정말 통달한 사람처럼 왕 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보석함에 꺼내어진 사람은 동거인과 친한 동생 J였다. 묘하게 딴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과 가끔 영혼이 없는 리액션까지.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사람 나와 무언가 겹치는 구석이 있다. 나는 첫 만남에 J에게 물었다.
“혹시 INFJ세요?”
“오! 어떻게 아셨어요? 대박”
MBTI는 유사 과학이고 특정 틀 안에 사람을 구겨 넣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타입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감정선이나 성격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INFJ라는 카테고리에 있는 사람들은 감수성이 높고 자신의 의견을 돌려 말하는 특징이 있다.. 먼 미래의 일까지 부러 걱정하고 많은 감정을 한 번에 느끼는 사람들. 우리가 느끼는 대로 누군가가 초상화를 그린다면 피카소의 <우는 여인> 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J와 만나는 날이면 ‘그렇지. 맞지’ ‘언니는 알지?’라는 말을 가장 많이 주고받는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최최최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생각하는 우리는 늘 고민의 불구덩이 속에서 헤엄친다. 불안을 반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함께 불구덩이에서 헤엄치는 사람을 보게 되어 이제는 조금 덜 외롭다.
마지막으로 내가 보석함에서 꺼낸 사람은 동거인 H의 오랜 친구인 E이다. E는 동거인 H처럼 쿨하고 뒤끝 없는 성격을 가졌다. 어디 가서 말로 절대는 지지 않는 성격이며 ‘호락호락하다’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사람. 언젠가는 넌지시 E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E님은 말로 져 본 적 없으시죠?”
“예… 전 20살 이후부터 마음에 쌈닭을 품고 다녀요…’
“그렇구나…그러면 버스 못 타시겠어요…2인 찍어야 하니까…”
“네! 그래서 항시 자차 운영 중입니다.”
나와 다르게 호방한 기운을 가진 그녀는 나의 작가 도전을 언제나 응원해 주며 성실하게 의견을 주는 편집자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나를 편집하러 오는 구원자. E는 절대로 허튼소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오늘은 우울해서 글을 못 쓰겠어요. 다 저만 빼고 글을 잘 쓰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네?”
“다 작아지셨으면 인제 글을 다시 쓰시면 되겠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까지 탈탈 털어 글의 소재로 쓰라는 E의 조언에 나는 오늘도 자세를 고쳐 앉는다. 이미 끝냈어야 할 사회화를 서른이 넘은 시점에 시작한 게 아닌가 싶지만 요즘은 주책맞게 친구들과 노는 게 즐겁다. 오늘도 내일도 내일모레도 이 친구들과 실컷 떠들며 놀고 싶다. 혼자임이 두렵던 나는 동거인의 보석함 덕분에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이번 세계의 나는 요즘 이렇게 외친다. “아 조금만 더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