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살이 12년 만에 처음
아내: "어떡하지? 피가 나는 거 같아"
새벽 1시,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불안감을 보이는 그녀.
나: "색깔은? 많이 났어?"
어디서 찾아보고 들은 건 있어서 기본적인 것을 체크해 보았다.
하지만 날로 먹은 지식이 깊이가 있겠는가, 최악인지 아닌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뿐.
일단 아픈 곳도 없고, 많이 있는 사례라고 하니까 일단 자고 아침에 다시 보자.
아침에도 계속 출혈이 있으면 일단 응급실을 가기로.
하지만 일단 잔다는 것 자체가 아주 힘든 일이었다.
거의 반 뜬눈으로 지새우고 아침에 담당의사에게 물어보니 응급실을 가보란다.
그래서 필요한 걸 준비하고 직접 운전해서 정해진 병원의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 병원비 엄청 비쌀 텐데 그걸로 성이 안 차나
하루종일 답답하고 험난한 응급실의 시간이 이렇게 거지같이 시작되었다.
도착이 대략 오전 10시, 접수를 하고 대기
오전 11시, 응급실 방에 옷 갈아입고 대기
낮 12시, 피검사를 위한 채혈
오후 1시, 처음 의사 대면 후 오늘 진행될 과정 설명
오후 2시, 초음파검사실로 이동 후 초음파 검사
오후 3시 30분, 소변검사
그리고 오후 4시, 의사의 소견
의사: "I'm sorry, it looks like miscarriage."
우리는 이미 각오가 충분히 되었기 때문에 견딜만했다.
일찍 몸과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주신 거라 여기고 감사하기로.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되새기기로.
이제 하루가 끝나나 생각했는데, 응급실 의사가 우리 담당 의사에게 알려주고 다시 의논한 뒤 오겠다고 한다.
그리고 5시쯤,
의사: "담당의사가 말하길, 혹시나 1%의 찬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집에서 쉬고 이번주에 병원 예약을 꼭 잡아서 진료를 다시 하자고 하네. 혹시 출혈이 너무 심해지면 응급실에 다시 오고, 그게 아니면 예약 잡아서 다시 진료받으러 와"
아직 우리 만두 있는 건가?
짐을 챙기면서 간호사들에게 좀 더 질문을 했는데
그들의 대답이나 배려는 이미 결과를 예상한듯한 태도여서 말해준 가능성만큼의 기대감을 갖기도 어려웠다.
집에 와서도 아내는 생리통과 흡사한 지속적인 통증을 겪었고,
하루종일 너무 진이 빠져서 일찍 쉬기로 했다.
힘든 하루를 되돌아보니 과정 하나하나 사이에 슬픔을 한 바가지씩 마음에 부어 넣었고
그 와중 사이사이 병원비 걱정하는 내 꼴을 보며 스스로와 사회에 분노를 섞어 넣었다.
그렇게 혼합된 감정은 한없이 무거웠고 그만큼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내는 두 문장을 하루종일 되뇌었다.
"내가 뭘 잘 못했을까?"
"오빠는 괜찮아?"
잘못이 있다면 술을 즐기는 내 몸과 충분히 다정하지 못한 내 문제일 것 같은데
참 미안하고 고마웠다.
오늘의 이 일이 우리 가정을 오랫동안 더 단단히 해주는 하루였기를.
(03/06/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