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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자미상 Aug 30. 2019

8/29-30

2019년 여름 마지막 날 밤의 의식의 흐름


밤 11시

업무는 사무실의 전등이 일괄 소등되고서도 삼십 분이 지난밤 11시쯤 돼서야 끝이 났다. 오,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디선가 파트장이 “이렇게 형편없는 걸 가지고 끝났다고 말하냐”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념을 떨치고 싶은 마음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내일 휴가 결재를 올렸다.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새벽 2시

퇴근길에 집에 들러서 옷가지를 가방에 구겨 넣고 바로 김포공항으로 출발했다. 미룬 저녁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천안삼거리 휴게소에 들어와 우동을 시켜 먹었다. 주변은 생경한 모습이다. 새벽 2시에 깨어있는 사람들은 다들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어 보였다. 복대를 차고 있는 트럭 운전수, 밤새 편의점 카운터를 보는 점원, 피곤하고 무거운 표정의 검은 정장-흰 셔츠-검은 넥타이의 중년. 그리고 그 사이의 나 역시 머릿속에는 복잡한 사연이 뒤엉키고 있다.


우동은 그닥 맛이 없었다.


새벽 3시

고속도로 좌, 우로 간혹 모텔들이 서있다. 마치 낮에는 없었던 존재였던 것처럼, 밤마다 신기루처럼 나타나는 존재인 것처럼 건물 전체를 눈부신 형형색색의 LED로 감싸고 있다. 만약 저 전구들이 LED가 아니라 백열전구였다면 모텔 주인이 전기세를 내느라 깨나 고생했을 것이다. LED가 개발되어 이제 평범해진 탓에, 모텔 주인은 건물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방황하는 청춘과 불륜남녀를 초대한다. LED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이 기술이 불륜에 기여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과학의 발전이 인류를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준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AI, 로보틱스, 더 빠른 통신, 화성 탐사, 사물인터넷, 고성능 배터리는 무엇을 위하는가? 더 나은 삶을 위할 수도 있지만 전쟁과 이권다툼을 야기할 수도 있다. 신경쇠약, 사회부적응, 인간성의 상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과학에 열정을 붓는 만큼 철학, 인문학 역시 추구해야 한다.



새벽 4시 반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주차장에서 잠시 눈을 붙인 뒤 공항에 들어섰다. 공항은 4시 30분에 개장했다. 허망한 마음으로 회사에서 나선 지 고작 다섯 시간 반 만에 김포공항에 있다. 이대로라면 7시쯤에는 제주도에 있을 것이다. 멀리 떠난다는 것이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나 싶다. 결국 그 멀다는 것은 쉬이 결단하지 못하는 내 속마음과 꿈꾸는 삶이 먼 만큼 멀었던 것일까. 결단만 한다면 나는 런던이든, 이스탄불이든, 파리든, 샌프란시스코든 당장 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나는 자유로운 존재다.

공항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평일 첫 비행기를 타러 온 이 꼭두새벽에도 공항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가 싶다. 다들 일 안 하고 놀러 다니는 건가.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고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카페에서 베이글과 커피를 거의 살 뻔했다. 고작 두 시간 반 전에 밥을 먹었다는 것을 까먹었고, 피곤하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모닝커피를 찾은 것이다. 한 시간도 못 잤으니, 커피는 다음으로 미루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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