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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2월 22일 토요일의 공포

과학의 사실과 상상의 진실 사이에서 소름 돋는 공포를 경험하다.

by 마부자

금주 53일째, 루틴을 마치고 책상에 앉아, 어제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복습하는 개념으로, 플래그를 붙여둔 부분을 하나씩 읽으며 인상 깊은 문장들을 포스트잇에 옮겨 적었다.


요즘 블로그 이웃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필사를 실천하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된다. 필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장을 베껴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의 결을 몸으로 익히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필사가 독서뿐만 아니라 글쓰기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훈련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나도 언젠가는 필사를 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아직은 읽는 것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


완벽한 필사는 아니지만, 책을 읽다가 마음에 남는 문장이 있으면 책에 직접 메모를 하거나, 포스트잇에 간단히 적어 놓는다. 어쩌면 이것도 나만의 방식으로 하는 ‘필사’일지도 모른다.


꼭 정해진 형식이 아니더라도, 내가 인상 깊게 느낀 문장을 기록하고, 다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게 조금씩 나만의 방식으로 책을 내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언젠가 필사가 자연스럽게 내 습관이 되는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의 기록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낀다.

호프 자런의 과학 이야기에서 받은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소설을 읽기로 했다.


새롭게 선택한 책은

무라타 사야카의 단편소설집 <신앙>.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얼마 전 읽었던 송길영 작가의 <시대예보: 호명사회> 덕분이었다. 그 책에서 송길영 작가는 다가올 미래를 예견하는 흐름을 설명하며,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을 언급했다.

작가가 직접 추천한 소설이라면, 그 속에서 시대를 읽어내는 또 다른 시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과학에서 사회, 그리고 다시 문학으로 이렇게 연결되는 흐름이 새삼 흥미롭게 느껴졌다.


무라타 사야카의 <신앙>은 여섯 편의 단편소설과 두 편의 에세이가 한데 묶인 단편 작품집이다. 그중, 송길영 작가가 추천했던 단편은 <생존>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상상의 미래 그곳에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생존율이 결정되며, 등급으로 나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과 태어날 자녀의 생존율을 높이는 것에 모든 삶을 바치며 살아간다.

처음 송길영 작가의 추천을 읽었을 때, 나는 무라타 사야카의 <생존>이라는 책이 따로 있는 줄 알고 바로 검색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제목의 책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블로그 이웃들의 서평을 통해, 〈생존〉은 단편집 《신앙》에 포함된 이야기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이 책을 찾게 되었다.


인간의 삶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등급으로 나뉜다면?


그 설정 자체만으로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무라타 사야카 특유의 독특한 세계관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어제 읽었던 책은 모든 것을 소위 ‘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과학자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오늘 펼친 책은 그와는 정반대의 세계. 상상력을 기반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과학은 논리와 실험을 통해 사실을 밝히려는 과정이라면, 소설은 증명할 수 없는 것들 속에서도 진실을 찾으려는 과정이 아닐까.


어제와 오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두 권의 책으로 인해 이 두 세계를 오가는 경험이, 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이 책 《신앙》의 한 장면에서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학설이며,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는 아직도 천동설을 믿는 사람이 있고, 곧 직접 로켓을 만들어서 확인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주인공은 문득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왜 지동설을 믿는 걸까?"


우리는 누구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실제로 그것을 몸소 체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결국,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도, 내 경험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얻은 정보일 뿐 아닐까?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중요한 것은 별을 보며 자신이 생각한 대로 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왜 정답을 전제로 하늘을 보려고 할까?"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마치 현실과 상상이 뒤섞이며 사고의 틀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만약 호프 자런 같은 과학자가 이 말을 들었다면, 천지가 개벽할 일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두고 왜 의심하는가?”

아마도 그녀는 이렇게 반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무라타 사야카는 《신앙》은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엄청난 상상력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책을 읽는 동안, 소름이 돋을 정도 였다. 다행히, 이것은 소설 속 이야기일 뿐 상상의 미래이기 때문에 가능한 설정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소설 속 여섯 편의 단편들이 우리의 현실과 너무도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더 소름 끼쳤다.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어쩌면 이미 우리 삶 속에 조용히 스며들고 있는 변화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인데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공포를 느꼈다. 날이 풀렸다고 해도 서재의 창밖에는 매서운 바람이 창문을 치고 있고 책을 읽을 때 방안의 온도가 너무 높으면 졸음이 올까봐 보일러를 잠궈둔 방안의 서늘한 기운은 내 몸을 더욱 움추르게 만드는 소름돋는 공포였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시간을 보니 어느덧 12시.

오늘은 토요일, 아내와 선약이 있는 날이다. 책을 덮고 거실로 나가니, 아내는 이미 분주하게 청소를 마친 상태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집, 그리고 완벽한 외출 복장을 아내의 모습은 마치 곧 출근할 매니저가 방문을 열고 나오길 기다리는 프로선수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출발 준비 완료?"라고 묻는다.

아내는 거울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오늘의 약속을 향해 나설 시간이다.

그러나 잠시 후, 클럽 동호회 밴드에 오늘 오전 볼링장에서 단체 행사가 있어, 3시 이후부터 자리가 난다며 4시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주말은 운동도 쉬는 날이라 일찍 움직였는데 갑자기 일정이 미뤄지면서 예상치 못한 여유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아내와 함께 집 앞 미용실로 향했다. 아내의 사고 이후, 우리는 그동안 길러왔던 머리카락을 짧게 커트하고 있다. 단정하고 깔끔해 보이는 건 좋지만, 가장 큰 단점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흰머리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염색을 해왔기에 익숙했지만, 아내는 티가 날 정도는 아니라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수술 이후, 아내는 조금씩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평생 화장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 요즘은 외출할 때마다 부쩍 화장에 신경을 쓰고, 흰머리가 보인다며 염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내의 변화가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변화가 나쁘지 않다고 느껴졌다.


시간을 보니, 집에서 충분히 염색할 여유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염색약을 꺼내 아내의 머리카락을 염색해 주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아내는 머리카락을 계속 뒤적이며 구석구석 염색이 잘 안 된 곳이 있다며 장난스레 투덜댔다.


“그럴 거면 앞으로 미용실에서 돈 주고 하라고.

” 살짝 핀잔을 주었더니, 아내는 “뭘 조크를 그렇게 팩트로 받아 치느냐고.”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오히려 핀잔을 돌려준다. 순간, 서로를 쳐다보며 동시에 터진 웃음. 차 안에서 한바탕 크게 웃고 나니, 어느새 볼링장에 도착해 있었다. 이렇게 별것 아닌 대화 하나가, 순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내일 아내는 단체전 참가 선수로 예정되어 내일 참가할 팀원들과 오늘 연습을 하며 컨디션 조절에 들어간다. 늘 그렇듯 하루 전날 연습은 항상 점수가 잘 나온다. 컨디션 좋을 때 그만 해야 한다고 하며 3게임에서 마무리 한 뒤 내일은 팀전이라 팀웍이 중요하다며 같이 저녁을 먹고 들어가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에 난 설득 당해서 함께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금주 이전이라면 당연히 차를 볼링장에 두고 가거나 차 때문에 술을 못마시니 삼겹살집은 가지 않겠다고 했겠지만 나는 이제 소주 없이도 삽겹살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가 있는 사람으로 달라졌기 때문에 흔쾌히 따라 나섰다.


24절기 중 우수가 지나고 나면 낮과 밤의 길이가 달라진다고 하더니 이제는 6시가 다된 시간에도 날이 어둡지 않은 시기가 되어있었다. 물러나길 아쉬워하던 꽃샘추위도 이제는 저만치 가버리고 점점 봄이 다가오는 것을 체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술 없는 삼겹살을 배부르게 먹고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8시가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내는 소파에 앉아 몇 일전부터 시작한 볼링대회를 시청한다. 역시나 열정은…


그렇게 우리는 각자 서로의 자리에서 자신의 하루를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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