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아닌, 오직 너 자신과 함께 끝까지 가라!
금주 54일째, 늘 그렇듯, 차가운 공기가 잠을 깨우고, 명상을 마친 뒤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맞은편 아파트 위를 올려다보니, 초승달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보름달처럼 둥글고 가득 찬 모습이 아니라, 방긋 웃는 눈빛처럼 가느다랗게 떠 있는 달.
그런데도 그 희미한 빛이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치 나를 조용히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잘 시작하라고 속삭이는 듯한 기운. 잠시 자리에 앉아 달의 기운을 천천히 받아들이며 생각했다.
어제도 달이 있었을 텐데 왜 보지 못했을까? 우수가 지나고 밤이 짧아졌다고 해도 며 칠만에?
이 시간에 명상을 시작한 지도 벌써 3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왜 그동안 나는 달을 보지 못했을까?
그런 의문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그 이유를 깨달았다.
바로, 내가 명상을 하는 자리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늘 하던 대로 새벽에 일어나 베란다에 서서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 뒤, 거실로 들어와 자리를 잡으려던 순간. 후츄가 카펫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그 자리에 앉을 수 없게 된 나는, 결국 끝자리, 창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명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 명상을 마치고 일어서는 순간, 창밖에서 보이지 않던 초승달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나는 늘 정해진 자리에서 명상을 했고, 창가에서 일어나도 달이 보이지 않는 방향만 바라보았다. 그러니 오늘 자리를 살짝 앞으로 당긴 것만으로도 전혀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게 된 것.
그동안 나는, 이 환한 달빛을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문득, 이 빛을 오랫동안 놓치고 있었다는 아쉬움이 스쳤다. 그러나 동시에, 후츄 덕분에 내일부터는 달의 정기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변화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오늘 이 깨달음도, 오랜 꾸준함이 나에게 준 하나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 읽기 시작한 책에 대한 내용을 정리했다.
무라타 사야카의 <신앙>.
이 책은 여섯 편의 단편소설과 두 편의 에세이를 통해 현실과 상상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작품집이다. 얼핏 보면 기묘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읽다 보면 이 세계가 우리의 현실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각 단편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독특한 세계를 살아간다. 극단적인 현실주의자가 사이비 종교를 제안받고 흔들리기도 하고, 태어나면서 생존율이 결정된 사회에서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 등장한다.
전통적인 가족의 틀을 깨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사람, 완벽한 균일함 속에서 자란 아이, 자신의 개성을 숨긴 채 살아가는 지구인 같은 저자 본인의 경험이 투영된 인물들도 있다. 심지어, 클론과 함께 살아가며 정체성을 잃어가는 사람, 사라진 인류의 예술을 지키는 로봇까지, 이들의 이야기는 모두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미 이들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던진다는 점이다.
이 소설 속 세계는 과연 허구일까? 이미 우리는 감성보다 현실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부를 좇아 경쟁하고, 개성보다는 획일화를 강요받으며, 높은 빌딩 숲 속의 정해진 공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클론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라타 사야카는 이러한 현실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계에 의문을 던진다.
<신앙>은 단순히 기괴한 상상력을 펼친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을 과장 없이 비추는 거울이며, 독자에게 ‘우리는 과연 우리의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독특한 설정과 현실적인 문제의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미 ‘균일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생각을 정리하며 서평을 작성했다. 느낀 점을 정리하기 위해,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문장들을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몇몇 문장은 다시금 소름이 돋을 만큼 강렬하게 다가왔다. 책을 읽을 때도, 그리고 다시 되새길 때도, 같은 문장이 같은 힘으로 내 안을 흔드는 경험. 이것이야말로 진짜 좋은 문장이 가진 힘이 아닐까.
그저 한 번 읽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문장들.
오늘도, 그런 문장들 덕분에 내 사고의 범위가 조금 더 확장되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볼링 단체전에 참가하는 아내의 매니저를 위해 볼링장에 가야 하는 날인데 오전까지 서평을 작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내가 지하철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매니저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대구 시내에서 큰 행사가 열려 대부분 시내의 도로가 교통통제를 하기 때문이다.
“대구 국제 마라톤”이 오늘 대구에서 펼쳐진다. 거리마다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국내에서 개최되는 마라톤 대회 중에서 가장 많은 참가자(약 4만여명)와 가장 많은 상금이 걸린 명실 상부 세계적인 대회라고 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마라톤 코스의 교통이 전면 통제된다고 아침부터 아파트에 방송도 나왔다.
마라톤이야기가 나왔으니 잠시 마라톤의 유래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다.
“마라톤(Marathon)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전쟁 중 벌어진 마라톤 전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제국이 대립하던 중, 페르시아 군대가 아테네를 침략하려 했습니다. 이에 그리스 군대(특히 아테네 병사들)는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예상 밖으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승전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필리피데스 라는 전령이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려가 "우리는 승리했다! 라고 외치고 쓰러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오늘날 마라톤의 기원입니다.
고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의 거리는 약 40km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마라톤의 공식 거리는 42.195km입니다.
그 이유는 1908년 런던 올림픽 때 영국 왕실이 경로를 변경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42km였던 코스를 "왕실 가족이 경기장 내에서 결승선을 볼 수 있도록" 385m를 추가해 42.195km로 확정되었고, 이후 이 거리가 공식 마라톤 거리로 정착되었습니다.
1896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마라톤이 공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습니다.
당시 승자는 그리스의 스피리돈 루이스였으며, 이후 마라톤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스포츠로 자리 잡았습니다.
마라톤은 단순한 달리기가 아니라 인내와 도전의 상징입니다. (출처: 챗gpt)
"마라톤은 어쩌면 경쟁 상대가 없는 유일한 스포츠다."
문득 마라톤에 대한 기원을 생각하며 이 문장이 생각났다. 마라톤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경기가 아니다. 옆 사람을 견제하거나, 순간적인 기량으로 승부를 가르는 스포츠도 아니다.
오직 나 자신과의 싸움, 끝까지 버텨야 하는 인내의 시간. 그렇기에 마라톤이야말로 진정한 꾸준함의 상징이 아닐까. 42.195km라는 거리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보다 빠르게 달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정한 리듬을 지키는 것, 고비를 넘기고 다시 한 발 내디디는 것. 마라톤을 완주하는 사람들은 그 긴 여정을 오직 자기 자신과 함께 버텨낸다.
그런 의미에서, 마라톤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경기의 끝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겨낸 증거가 된다. 수없이 반복되는 인내와 고통, 그리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버텨낸 시간이 녹아 있다.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력까지 한계에 몰리는 경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달리는 그들의 모습은 어떤 수식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열정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또 누군가는 단순히 완주를 목표로, 혹은 스스로에게 도전하기 위해 긴 거리를 달린다.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간다'는 그 마음 아닐까.
마라톤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인생의 축소판이며, 매 순간 흔들리는 우리에게 묵묵히 한 가지 가르침을 건넨다.
"남이 아닌, 오직 너 자신과 함께 끝까지 가라."
마부자의 생각^^
우리가 가는 볼링장은 도심 한복판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 오늘 하루 차량 진입이 전면 통제된 상황이었다. 결국, 아내는 지하철을 이용해 볼링장으로 향했다. 볼링을 마치고 돌아올 때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출발하기 전, 중요한 시합을 앞둔 선수 컨디션에 문제가 생겼다며 투정을 부리는 아내.
현관문을 나서며 “이래서야 제대로 된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겠어?”라는 말이 농담처럼 흘러나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으며, 짧은 응원을 건넸다.
"어차피 컨디션 안 좋아도 잘할 거잖아. 힘내고 와!"
아내는 못 이긴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고, 그렇게 현관문이 닫혔다.
의도치 않게 생긴 조용한 일요일. 아침부터 공기는 차가웠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흐릿했다. 어딘가 텅 빈 기분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 문득 지난주에 미처 물을 주지 못했던 율마가 떠올랐다.
베란다로 나가보니, 그동안 방치된 율마들이 황토색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하루이틀 사이에 일어난 변화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따라 그 메마른 색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어제 읽었던 랩걸 때문이었을까.
책 속에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곱씹으며 감탄했던 내가, 정작 내 곁에 있는 작은 생명을 이렇게 소홀히 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짓눌렀다.
씨앗에서부터 온 힘을 다해 자라, 푸른 이파리를 피우려 애썼을 얇은 기둥. 그 작은 존재가 단지 내 무심함 때문에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율마를 키운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저 물을 줄 때만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니었을까.
책 한 권이 인간에게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감정이야말로 어떤 책임감보다 깊숙이 스며든다는 것을, 오늘, 죽어버린 율마를 보며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아직 죽지 않은 율마들에게 물을 흠뻑 주며 조용히, 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율마야. 앞으로는 잘 보살펴 줄 테니, 죽지 말고 잘 자라렴."
식물도 마음이 있다면, 나의 사과를 이해해 줄까. 오랫동안 무심했던 내가, 이제야 다시 손을 뻗는 걸 용서해 줄까. 율마의 잎이 천천히 물을 머금으며 다시 생기를 되찾길 바라며, 나는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아내는 아마도 오후까지 볼링장에 있을 것이다. 남은 시간 무엇을 할까 망설일 필요 없었다. 책상에 앉아 새로운 책을 펼쳤다.
고명환작가의 <고전이 답했다>를 선택했고 늦은 저녁 완독을 하고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서평은 내일 일기에 작성하기로…)
오후 4시, 아내가 집에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얼굴에 가득한 아쉬움이 먼저 보였다. "컨디션이 엉망이었어. 점수도 마음에 안 들고…"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투정을 부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막내와 나는 피식 웃으며 "수고했어!" 하고 말했다. 아내의 투정 속에는 아쉬움과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섞여 있었다.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들어오자마자 속마음을 꺼내놓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그녀가 더 이야기할 시간을 주듯 물 한 잔을 건넸다.
결과가 어땠든, 애써 노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였을 테니까.
이른 저녁을 먹고 나니 하루 종일 볼링장에 있던 아내가 피곤하다며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막내도 방으로 들어가고, 거실은 조용해졌다.
다시 책상에 앉아 오늘 읽었던 책의 내용을 곱씹어 본다. 책 속 문장들이 머릿속을 맴돌다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어떤 문장은 스쳐 지나가고, 어떤 문장은 마음 한구석에 오래 머문다. 오늘도 그런 문장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나만의 필사를 했다.
거창한 노트를 만들지는 않았다. 그저 끌리는 문장을 포스트잇에 적었다. 그리고 노트북 위에 잠시 올려두었다가, 결국엔 책상 벽 한쪽에 붙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연스럽게 시선이 닿는 자리.
그렇게 눈에 익고, 문장이 내 안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필사는 단순히 문장을 옮겨 적는 일이 아니다. 좋은 문장을 붙잡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문장들이 내 삶의 방향을 조용히 이끌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오늘도 한 장의 포스트잇을 붙이며, 나만의 작은 의식을 이어간다.
어떤 문장은 유독 오래 남아 내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고, 어떤 문장은 지나간 하루와 겹쳐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한참을 머물다가, 다음 주에 읽을 책을 선정했다. 당연히 고전으로 결정했다.
고전은 언제나 나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걸 상기시키는 책들. 내면을 단단하게 만드는 문장들. 그런 문장을 다시 한번 마주하기로 한다.
내일 읽을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조용히 불을 끈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