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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2월 25일 화요일의 이타심

이기적 유전자도 결국은 ‘이타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by 마부자

금주 56일째.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했다. 루틴대로 아침을 보내고 책상에 앉아 달력을 바라보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아내와 함께 백령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고 있어야 했다. 부사관으로 근무 중인 아들을 만나러 가기로 했고, KTX와 배까지 예약을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마지막으로 아내와 일정을 조율하는 자리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누구보다 가고 싶어 했고, 먼저 계획을 세웠던 것도 아내였는데, 그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아내는 배를 타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인천에서 백령도까지 4시간 30분, 아무리 멀미약을 챙기고 대비를 해도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며칠 전, 아내는 갑작스럽게 이석증을 앓았다. 귓속의 작은 균형 감각이 흐트러져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그 어지러움. 그걸 다시 겪을까 봐, 혹여나 배에서 몸이 뒤틀리는 순간 다시 어지럼증이 시작될까 봐, 그녀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보니 단순히 ‘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충분히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걱정된다고 했지만, 그 감정의 본질은 두려움이었다. 섬에서 고생하는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 기쁜 마음으로 가야 할 여정이 그녀에게는 또 다른 부담이 되고 있었다.

혹시라도 배 위에서 몸이 아파지면, 아들에게까지 걱정을 끼치게 될까 봐. 강한 엄마로 남고 싶은 마음, 아들의 앞에서만큼은 언제나 괜찮아 보이고 싶은 마음이 그녀를 더 주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는 이제 와서 취소하는 것이 미안했다. 나에게도, 아들에게도.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여정, 떠나기도 전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여행. 이미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부담이 되고 있는 걸 알면서도 억지로 추진할 이유가 있을까.


여행의 본질은 결국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함인데, 지금 이 여행에는 그 본질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절대로 미안해하지 말라고,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으니 이번 여행은 취소하자고. 그녀가 부담을 안고 떠나는 여행이라면 가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자 아들은 잠시 말이 없더니, 곧 밝은 목소리로 "엄마랑 통화 좀 할게요"라고 했다. 전화를 넘겨주자 아들은 오히려 아내를 다독였다.


“엄마, 괜찮아요. 다음에 오시면 되죠.”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사실 그날 훈련이 있어서 조금 부담스럽긴 했어요.”


그 말에 나도, 아내도 동시에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서로를 걱정하고 있었구나. 괜히 마음을 무겁게 가질 필요가 없었다. 언제든 다시 갈 수 있고, 그때는 더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면 되는 일이었다.


정말로 훈련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들이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어느새 훌쩍 자라서, 자신의 감정보다 부모의 마음을 먼저 헤아릴 줄 아는 성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아들이 백령도로 들어간 지도 벌써 3년이 되어 간다.

어릴 적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아들.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는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걸 더 좋아했기에, 나는 늘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해병대에 가겠다고 했다. 그것도 스스로 지원해서.


예상치 못한 결정에 놀라기도 했지만, 더 놀라운 건 그의 적응력이었다. 사병으로 입대했던 아들은 군 생활이 체질에 맞는다며 부사관으로 전향했고, 그 길로 백령도를 선택했다.


처음에는 걱정이 앞섰다. 내성적인 아이가 외딴 섬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군대라는 조직 안에서 사회성이 부족한 그가 적응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모든 걱정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이었는지를,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걱정이 자식 걱정이라는 말, 틀린 말 하나 없었다. 아이는 자신의 방식대로 성장하고 있었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세상을 배워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오늘, 인천항이 아닌 대구 집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쉬움보다는 안도감이 먼저였다. 아들은 잘 지내고 있고, 우리는 언제든 다시 갈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의 마음이 편안한 상태로 다시 만나는 날일 테니까.


어제 읽었던 래프 톨스토이의 명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본다. 어제 두번이나 읽어서인지 아니면 너무 강하게 파고든 작가의 생각 덕분인지 아직도 책의 내용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자세한 책의 줄거리는 브런치 매거진을 확인해주세요)


이 책을 읽고 내가 느낀 강한 감정하나는 인간 그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다. 자신의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처음엔 강한 부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닐 것이다. 그저 조금 아픈 것뿐이다. 나쁜 짓 안하고 착하게 잘 살아온 나에게 설마 이것은 사소한 통증일 뿐이다. 라는 생각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질문은 바뀌어 간다. 내가 죽을 수 있다고? 아직 죽는 것이 확정되지 않았으니 난 분명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 희망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이반 일리치의 모습은 처절할 정도로 안타까움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며 그의 질문은 또 달라진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가 잘 못 살았나? 내가 대체 왜 죽어야 하지? 나보다 세상을 열심히 살지 않은 저들은 살아있는데 난 왜 죽어야 하지? 이반 일리치의 질문은 이제 세상을 향한 증오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고 자신이 죽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이반 일리치는 다시 자신에게 질문한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삶은 내가 진정 원하던 삶이 아니었구나? 내가 행복했던 시간들은 언제 였을까?


자신은 산을 오른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은 산에서 내려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 이반 일리치는 자신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그것”을 잘못 알고 살아왔구나!


내가 항상 원했던 “그것”의 모습은 바로 감사와 사랑이었구나! 그리고 “죽음은 곧 빛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이반 일리치는 45년을 살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을 찾아가며 살아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죽기 직전에서야 깨닫는다.

자신이 평생 해왔던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이것이 결국 톨스토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닐까

우리는 매일 경쟁하듯 살아간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누군가를 시기하고, 이기려 하고,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를 고민할 틈도 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정말 그 길이 우리가 원하는 삶일까?

죽음 앞에서야 깨닫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 우리의 삶에서 던져야 할 질문을 다시 해야 하지 않을까?

얇은 책 한 권. 하지만 그 어느 책보다도 무거운 질문을 품고 있었다. 160년 전의 작가, 레프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라는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나에게 묻고 있었다.


“지금, 그대는 잘 살아왔는가?”

“지금, 그대는 잘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책을 덮지 못하게 했고,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어떤 질문을 품고 살아왔는가? 내가 믿어온 가치들은 과연 진짜였는가?


한 권의 고전이 또 하나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조금 더 성장했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성장하는 동물이다. 그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며, 나는 이 책을 마무리한다.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새로운 책을 펼쳤다.


이번에는 슈테판 클라인의 『현명한 이타주의』.

고명환 작가는 “남을 위해 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너무 ‘나’만 보며 살아온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타주의’라는 주제에 관심이 갔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게다가 얼마 전, 송길영 작가도 책 속에서 이 책을 추천했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많은 책들이 결국 강조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걸 점점 더 깨닫고 있다. 아직 나는 초보 독서가라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확실하게 발견한 키워드는 ‘배려’였다.


다른 말로 하면 ‘함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고, 세상은 나와 타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라는 것.


그 ‘함께’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어, 나는 오늘 이 책을 펼쳤다.


오전 내내 책을 읽다가 문득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나는 ‘이기적’이라는 단어를 더 자주 사용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 기준에 맞춰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채사장의 <지대넓얕>을 읽으며 인간은 생존을 위해 끝없는 진화를 거듭했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익숙하게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문득, 나는 그 메시지를 너무 단편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정말 말하고자 했던 건 이기적 유전자마저도 결국은 ‘이타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진정한 생존은 타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배려의 본질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결국 신뢰라는 감정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


그런 생각을 되새기며,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면서 이 책이 던진 질문들을 내 안에서 조금씩 정리해 보기로 했다.


오늘의 영상은 어제에 이은 故 이나모리 가즈오의 <왜 일하는 가?>의 후속영상이었다.

훌륭한 사람의 마음을 아무리 갈구한다고 해도
정작 내 마음이 훌륭하지 않으면
그런 마음이 가진 사람이 내게 찾아오지 않는다.

하와이 대저택


성공의 기본은 관계이고 그 관계의 기본은 나 스스로가 먼저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드렸다. 성공한 사람의 눈에는 성공할 사람들이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성공할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보이는 것은 아마도 기본이라는 것이 가장 먼저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운동을 마치고 모든 오후 일정을 마치고 나서 마시는 커피한잔의 여유가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청소를 한다고 열어놓은 베란다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아직 쌀쌀했지만, 한동안 매섭게 몰아치던 동장군의 강한 입김은 물러가고 차가움보다는 시원함이 더 느껴지는 오후였다.


날이 조금 더 풀리면, 이 짧은 오후 휴식을 베란다에서 보내보는 것도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베란다부터 정리해야겠다. 그리고 창고 안에 먼지 가득 쌓인 캠핑용품들 중에서 체어 하나를 꺼내놓자. 바깥 공기를 마시며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있다면, 그 또한 소소하지만 꽤 근사한 순간이 될 것이다.


다만, 오늘은 시간이 늦었다. 화요일은 선약이 있는 날이니까.

베란다의 오후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우리는 볼링을 마치고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다. 다행히 막내는 우리가 화요일마다 약속이 있다는 걸 알고, 여자친구와 저녁 약속을 잡았다고 했다. 덕분에 오늘은 따로 저녁을 준비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여유로운 틈을 타, 책상에 앉아 밀린 영상을 만들며 책의 내용을 다시 한번 곱씹는 시간을 가졌다.


퇴근한 아내와 함께 볼링장으로 향했다. 6시가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환한 하늘을 보며 낮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계절이 흐르고 있음을, 시간은 언제나 우리의 감각보다 조금 앞서 나가고 있음을.


볼링장에 도착하자 회원들은 지난주 일요일 단체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아쉬움을 만회라도 하듯 힘차게 공을 뿌리고 있었다. 마치 볼링 핀에 지난 경기의 아쉬움을 쏟아붓듯이. 그러다 결국 모두가 같은 말을 했다.


"시합 때 좀 이렇게 잘 치면 얼마나 좋을까…"

결과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마음을 풀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밤이었다.


볼링장 근처에서 간단히 저녁을 함께하고 돌아오는 길, 아내는 여느 때처럼 오늘도 자신의 점수에 대한 아쉬움을 가득 안고 있었다. 오는 내내 혼잣말로 "오늘 뭐가 문제였지?" 하며 스스로 복기하는 모습.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매니저로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묵직한 책임감을 다시금 느꼈다.


결국, 나 혼자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돕는 것.


오늘 하루의 끝에서 다시 한번 ‘함께’라는 의미를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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