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 이타주의, 개인주의는 무엇이 다를까?
금주 58일째, 프로그램된 루틴을 마무리하고 책상에 앉아 어제 읽었던 책에 대한 정리 및 서평을 작성했다. 슈테판 클라인<현명한 이타주의자>
(자세한 책의 내용과 줄거리는 “매거진”에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 책은 확실히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와는 결이 다르다. 어제도 잠깐 언급했지만, 현명한 이타주의자를 읽으며 내가 갖고 있던 ‘이타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이타주의를 단순히 ‘남을 배려하는 마음’,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타적이라는 것은 곧 무조건적인 양보를 의미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이타주의는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더 크고 본질적인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을.
저자는 기존의 이타주의 개념을 다시 정리하려는 듯 보인다. 때로는 ‘혹시 이기주의를 미화하기 위해 이타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의 접근법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며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게 된다. 결국, 이타주의란 타인을 돕기 위해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 모두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감정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갈 미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될 것이라는 점에 깊이 동의하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 역시도 ‘나는 정말 이타적인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과 현명한 이타주의자가 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그 차이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내게 ‘이기적’이라는 개념을 가장 강렬하게 각인시킨 사람은 리처드 도킨스였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그는 인간이란 결국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기계일 뿐이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이기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필연적인 것인지 깊이 깨달았던 기억이 난다.
도킨스의 논리에 따르면, 생명체는 오로지 자신에게 유리한 유전자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유전자는 제거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이어간다. 그 개념이 너무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어서, 나 역시 한동안 ‘이타심’이라는 감정이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착각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생존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타주의란 결국 일종의 전략에 불과한 것 아닐까, 하고.
그런데 현명한 이타주의자의 초반부를 읽으며 나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마주하게 됐다. 슈테판 클라인은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오히려 ‘이타적 유전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타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며,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 그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연구와 실험 결과들은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실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으며 마치 내 안의 유전자가 반항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럴 리 없어, 생존은 결국 개인의 문제야’라고 말하는 도킨스식 사고와, ‘우리는 서로를 돕고 협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어’라고 말하는 클라인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순간들이었다. 이 두 개의 상반된 개념 속에서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흥미로웠다. 과연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일까, 아니면 근본적으로 이타적인 존재일까?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저자의 주장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니, 이해보다는 공감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저자는 분명 이타주의를 강조한다. 하지만 동시에 생명체가 본래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다만, 그 이기적인 유전자의 활동은 오직 개체가 태어나 독립적인 생활을 하며 생존을 유지하는 단계까지라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원숭이나 유인원과 같은 생명체들이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그들은 ‘이기적인’ 방식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협력하고 돕는 것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되었고, 그렇게 ‘이타적인 유전자’가 우위를 점하며 오늘날 인간의 모습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특히, 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점차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형성하며 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과정에서, 그 근본적인 원동력이 바로 이타적인 유전자였다는 저자의 주장은 흥미로웠다.
인간이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생존을 위해 점점 더 ‘현명한 이타주의’를 선택하며 변화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는 보다 ‘진화된’ 형태의 이타적인 유전자로 변화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타주의를 도덕적 덕목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인간 본성의 핵심이라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나기 시작했다. 도킨스가 말했던 이기적 유전자와 클라인이 주장하는 이타적 유전자. 그 사이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선택하며 살아가야 할까?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질문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그리고 개인주의.
그렇다면 이 세 가지 개념의 차이는 무엇일까?
책을 읽으며 내 사고의 울타리를 한 단계만 더 넓혀보려 했지만, 문득 내 필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서는 분명하게 정리되는 것 같은데, 막상 글로 풀어내려 하니 단어들이 흐트러졌다.
그래서 그냥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정리를 시도해본다.
이기주의: 내가 못하니까 너도 절대 하면 안 돼!
이타주의: 나는 못하지만, 너는 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개인주의: 나는 못했는데, 뭐... 너가 해도 난 상관없어!
이렇게 정리해보니,
결국 핵심은 ‘타인의 행동에 대한 나의 태도’인 것 같다.
이기주의는 타인의 가능성을 막아버리고,
이타주의는 타인을 돕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개인주의는 그저 개입하지 않는 것.
마부자의 생각^^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이 세 가지 태도는 단순히 흑백논리로 나뉘지 않는다. 때로는 개인주의적인 태도가 필요할 때도 있고, 어떤 순간에는 이타적이어야 하며,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어야 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개념을 어떻게 균형 있게 조화시키느냐가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바로 “현명한 이타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저자는 다가올 미래는 “무중력 경제”의 시대가 올 것 이라고 예측했다. 처음 듣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저자는 무중력 경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자원보다는 정보에 가치를 두는 경제” 이 한 문장으로 미래의 경제 개념을 정리하기에는 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챗GPT의 도움을 요청했다.
“무중력 경제란 “ 기존의 물질적 경제 원칙에서 벗어나, 지식, 정보, 네트워크, 신뢰와 같은 비물질적 요소가 핵심이 되는 경제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전통적인 경제는 희소성(scarcity)을 기반으로 합니다. 즉,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경쟁을 통해 이를 분배하는 것이 경제의 핵심 원리였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존 경제는 희소성과 무거운 자원(물리적 재화)의 한계에 얽매여 있었지만,
현대 경제는 비물질적인 요소(지식, 신뢰,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작동하며, 이러한 요소는 중력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것처럼 확장 가능합니다. 따라서 "무중력 경제"는 협력과 이타주의를 통해 지속 가능하고 발전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을 상징하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점점 무중력 경제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더 이상 유한한 자원을 소모하며 성장하는 경제가 아니라, 강력한 네트워크를 통해 개인들이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하는 시대.
이 변화 속에서 중요한 것은 ‘혼자 살아남겠다’는 이기적인 사고가 아니라, ‘함께 성장하겠다’는 태도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현명한 이타주의자란 단순히 남을 돕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이 함께 성장하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펼칠 때만 해도 나는 단순히 배려, 협력, 봉사 같은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힐링’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깊이 끌려갔다. 이 책은 나를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감성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논리의 힘으로 ‘왜 우리가 이타적이어야 하는지’를 증명해 보인다.
그 느낌이 강렬했다. 며칠 전 랩걸을 읽었을 때처럼, 나는 또 한 번 ‘과학의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했다. 어쩌면, 나의 사고를 확장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은 감성이 아니라, 논리와 증거로 무장한 지적 도전일지도 모른다.
책을 덮은 후에도 여운이 길게 남는다. 이타주의가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식’이라면? 나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는 ‘현명한 이타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그 질문이, 아직도 내 안에서 계속 맴돈다.
식물학에서 시작된 과학이 어느새 진화생물학을 거쳐 사회심리학까지 확장되었다. 예상치 못한 영역까지 아우르는 이 책을 읽으며, 마치 원래는 한 가지만 주문했는데 덤으로 엄청난 서비스까지 받은 기분이랄까. 한 권의 책이 이렇게까지 사고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다니, 새삼 감사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감사의 마음만으로는 하루를 마무리할 수 없다. 책을 덮고, 다시 몸을 움직일 시간.
오늘의 영상에서 다룬 책은 존 크럼불츠와 라이언 바비노의 <빠르게 실패하기>였다.
"형편없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라."
하와이 대저택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은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더욱 키우는 것이 바로 타인의 시선. 하지만 책은 단호하게 말한다.
"사실, 타인은 우리에게 큰 관심이 없다."
내가 신경 쓰는 타인의 시선은, 결국 내가 만들어낸 착각일 뿐이다. 내가 타인을 의식하기 때문에, 타인도 나를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는 것.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바쁘다.
그렇다면 결국, 나를 가장 크게 가로막는 것은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두려움이다.
"이런 형편없는 글을 누가 보기나 하겠어?"
"내가 이걸 시작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그렇게 시작조차 하지 못한 채,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고 만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만 남길 뿐이다.
어쩌면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형편없다"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와 있었다.
"정도가 너무 심하여 좋지 않다." (표준국어대사전)
결국 "좋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형편없다는 말을 마치 "잘못됐다", "틀렸다", "쓸데없다" 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좋지 않다’는 것은 ‘잘못됐다’와 같은 말이 아니다.
좋지 않으면 계속해서 좋게 만들면 된다.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함으로써 고쳐나가는 것.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완벽한 시작’이 아니라 일단 시작하는 것 아닐까?
형편없는 글을 쓰더라도, 형편없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계속 하다 보면 형편없지 않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거나,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위대한 것들도 결국 그렇게 시작되었을 테니까.
운동을 마치고 샤워를 한 후 특별한 일정이 없어 습관이 된 루틴을 완성하고 글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아내가 퇴근하고 함께 저녁을 먹고 간단한 담소를 나누고 아내와 간단히 짐을 챙겼다. 내일 오랜만에 어머니도 뵙고 모임이 있어 2박 3일 일정으로 인천에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짐을 챙기고 우린 서로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