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1.모녀의 첫 싱가포르 원정이 시작되었다.

by 마부자

오늘 오전, 우리 집에는 비상사태가 선포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아내와 딸이 동시에 반차를 쓰고 귀가했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동시에 반차를 쓰고 들어오는 일은 거의 독립선언급 사건인데, 그 이유는 인천공항 출정이라는 거대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출정의 이면에 얼마전 내가 던진 한 마디가 이렇게 거대한 프로젝트로 발전할 줄은 몰랐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난달 딸이 “요즘 싱가포르가 그렇게 좋대”라고 말했을 때 나는 별 의미 없이 “네가 다 알아보고 엄마 랑 둘이 다녀오고 가이드까지 하면 비용은 아빠가 낼게”라고 던졌다.


그 말은 내가 물 위에 던진 작은 떡밥이 아니라 대형 참치를 낚는 미끼였다는 사실을 며칠 뒤 깨닫게 되었다.


딸은 비행기표가 나왔다며 예약할 거냐고 물었고, 아빠라는 직책은 한 번 뱉은 말을 다시 삼키지 못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기에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허락을 했다.


그날 이후 내 휴대폰은 예약 완료, 숙소 확정, 식당 예약등의 결제 승인이라는 알림 폭탄을 맞기 시작했다.


송금을 하고 나니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나는 그 속도를 보며 기술의 발전이 무섭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래도 이런 건 참 편하다”라는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얼마전 막내도 친구들과 일본을 자유여행으로 다녀왔듯이 영어 또는 외국어 한마디 못해도 당당히 자유여행을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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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딸과 아내가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으로 떠난다고 하니, 이제 우리 집은 여행사 없이도 돌아가는 시스템을 갖춘 셈이 되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재정 후원자 겸 공항 배웅 담당”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았다.


출발 직전 아내에게는 “절대로 딸에게 복종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해주었고, 딸에게는 “엄마가 혹시 쉰소리를 해도 이해하고 잘 데리고 갔다가 꼭 데려와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두 사람은 그 말을 들으며 이미 서로를 감시할 준비를 마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세상 둘도 없는 친자매처럼 붙어 있다가도 어느 순간 돌변하여 원수 모드로 돌입하는 롤러코스터 같은 구조이기에, 나는 혹시 싱가포르에서 국제 분쟁이 일어날까 봐 미리 외교적 조율을 마친 셈이었다.


딸에게는 “잘 모시고 오면 금전적 보상”을 약속했고, 아내에게는 “잘 따라다니면 다음엔 내가 같이 간다”는 당근을 제시했더니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이유로 흔쾌히 동의했다.


나는 협상에 성공한 유엔 사무총장 같은 기분으로 현관을 나섰다. 동대구역 앞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묘하게 조용했다.


동대구-광명-인천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고, 잠시 뒤 두 모녀가 면세점에서 무얼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카드 긁는 알림이 몇 차례 도착하자 비로소 원정대가 실전 모드에 들어갔음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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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여섯 시 ‘탑승완료-출발’이라는 메시지를 받고 나니 집 안이 갑자기 넓어진 느낌 아닌 느낌이 들었다.


딸은 매일 자기 집에서 지내던 터라 큰 변화가 아니었지만 아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것은 재작년 병원 입원 이후 처음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가슴을 건드렸다.


그리고 잠시 뒤 그런 허전함이 먼저인지, 자유의 해방감이 먼저인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 현실에서 망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시간이 되어 “이제 나 혼자 먹는 밥이네”라고 중얼거리다가도 “며칠은 좀 편하겠네”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오는 걸 보니 내 마음도 꽤 솔직하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아마도 모레쯤이면 결론이 날 것이다. 딸에게 “거기 두고 와라”라고 말할지, 아니면 “꼭 데려와라”라고 말할지.


그 결정은 아마 집안 정리 상태와 내 밥상 퀄리티 그리고 모녀의 현지 상황에 따라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의 싱가포르 원정대를 조용히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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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밝은 표정으로 비행기를 탔다고 인증샷을 보내준 것 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어머니가 콜라비로 깍뚜기를 담궈 보내주셨는데 너무 맛있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캐리어를 끌고 가는 모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냥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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