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rocco - Marrakech
메디나, Bab Agnaou와 Saadien 왕조
메나라 가든에서 보면 멀리 일직선상으로 쿠투비아 모스크의 미나레트가 위치한다. 마음 같아서는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앞서지만 쿠투비아의 높이는 약 77m에 달한다. 그냥 가까워 보일 뿐이다. 걸어갈까, 하는 마음을 단념하고 메나라 가든에서 택시를 타고 메디나로 가자고 했더니 메디나에 있는 8개의 문중에 메디나의 남쪽, 왕궁의 정문으로 사용된 아그노 문Bab Agnaou 앞에 내려준다. 12세기에 만들어진 시간의 때가 묻은 중후하면서도 격조 있는 대형 아치의 문에 한 눈에 반해버렸다. Bab Agnaou의 세월을 품고 있는 풍채는 모로코를 함축해서 말해주는 듯하다.
메디나에는 어떤 왕조보다도 사디 왕조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사디 왕조(1554~1659)는 Draa강이 있는 계곡에서 발원한 왕조로 이전의 베르베르 왕조와는 달리 아랍계 혈통의 왕조이다. 모로코에서 드라 계곡은 전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어서, 이 곳을 거점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많은 전투들이 있었으며 알모라비드와 Saadi왕조 그리고 17세기의 Alaouites왕조가 발흥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아그노 문을 들어서니 어디서 왔는지 삼삼오오 여행자들이 갑자기 많아진다. 근처에는 사디안 능Saadien Tombs과, 12세기 말경 세워진 녹색의 띠를 두른 카스바 모스크Mosque of the Kasbah, 바디 펠리스 등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에서 메디나 여행을 시작한다.
아그노 문에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카스바 모스크, 사디안 능, 바디 팰리스, 바히아 팰리스, 다르 시 사이드, 마라케시 박물관, 밴 유세프 메데르사 순으로 이어져 있다.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카스바 모스크 옆 골목길에 있는 사디안 영묘에 들어서면 녹색 고깔 모양을 한 지붕이 먼저 들어온다. 메나라 가든에 있는 파빌리언의 지붕과 같은 것이, 역시 같은 왕조Saadi때의 유적이다. 사디안 능은 비교적 최근(1917년)에 발굴되었으며 지금도 계속 복원하고 있는 사디Saadi왕조의 영묘이다. 그중에서도 Ahmad al-Mansur(1578–1603)의 묘실은 과하지 않으면서 정교한 모자이크와 천정을 가볍게 떠받치는 듯한 경쾌하게 균형 잡힌 대리석 기둥이 차분하다. 하지만 영묘를 돌아보는 동안 내내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의 모습이 지워지질 않는다.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1238~1358)은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국가였던 나스리드 왕조 Nasrid의 궁으로 1232년 무하마드 1세가 건국하여 1492년 기독교 연합군에게 그라나다가 함락되면서 항복하기 전까지 23명의 군주가 통치하던 왕조였다. 이 왕조를 끝으로 711(또는 718년)년에 시작된 이슬람교도들의 이베리아 반도 통치는 1492년 막을 내린다. 이베리아 반도의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이 있었던 15세기에서 16세기 초 무렵에는 스페인에 거주하던 많은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이 모로코로 이주를 하는데, 이들은 스페인의 예술과 행정 및 학문, 관리를 담당하는 지도자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주하던 사람을 따라서 문화의 큰 물결이 모로코로 흘러 들어왔을 것으로 사디 왕조(1554~1659)를 포함하여 이후의 모로코는 풍부한 인적자원으로 학문과 예술이 빛을 발했다. 그러므로 이후에 나타나는 건축물에서 알람브라 궁전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메디나 안에는 큰 궁만 해도 5개나 있다. 시대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세워진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보면, 처음 알람브라 궁전을 봤을 때의 충격만큼은 아니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8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던 같은 문화권이었던 것을 생각하고 보면, 보는 재미가 생긴다.
El Badi Palace
사디안 능 옆이지만 생각보다 복잡해서 골목을 물어서 가야 한다. 16세기 사디왕조의 가장 유명한 술탄인 Ahmad al-Mansur(1578–1603)의 궁이었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견고한 성채부터 보는 이를 압도한다. 알람브라 궁에서 영감을 받아 지었다는 바디 팰리스는 궁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채의 골격을 본다는 것이 맞다. 바닥의 일부 모자이크만 남아있을 뿐, 살이 다 떨어져 나가버린, 성의 제대로 된 골격만 드러내 놓고 보여준다. 견고하면서도 튼튼한 오래된 흙 담의 뼈대만이 남아있으나 장엄한 위엄은 결코 덜하지 않다.
중앙의 기하학적인 구조를 가진 정원은 물을 중심으로 모로코 전통의 정원 양식에서 흔히 나타나는 오렌지 정원이 위치한다. 오렌지 정원은 스페인의 정원에도 나타나는 양식으로 북아프리카 문화가 그대로 남아있는 예이다.
만수르왕이 거닐었을 그때도 있었을까, 성벽에는 몸집도 커다란, 하지만 우아한 황새들이 대대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것 같다. 화려한 궁의 모습이 아닌, 속살이 다 드러난 궁전의 폐허는 넋을 놓고 한참을 머물게 한다.
바디 팰리스에서 그나마 당시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곳은 궁을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만나는 입구의 왼쪽에 있는 테라스이다. 리듬감이 넘치는 테라스는 폐허의 궁전에 살아있는 역동감을 선사하는 곳으로 바디 팰리스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Bahia Palace와 Dar Si Said
Bahia Palace는 1864년부터 6년 만에 준공한 집으로 지금도 한쪽에서는 왕족이 살고 있다. 160개의 방이 있는 19세기 당시의 모로코 건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이름이 "brilliance" 란 뜻을 가지고 있다는데 정말 그렇다. 차분하면서도 리듬감을 선사하는 타일과 나무문에 칠해진 아름다운 색채, 무어 풍의 화려한 천정과 정교한 스투코로 꾸며진 벽들과 기둥, 중앙에는 분수가 있는 각기 다른 정원들, 하늘로 뚫려있는, 오렌지 향기가 나는 정원에서는 빛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인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인지 광채가 난다.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이 생각나지만, 실내로 빛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절제된 장식으로 인해 알람브라 궁전보다 세련되고 현대적이며 빛이 더욱 충만하다. 넓은 야외정원이 있는 이곳을 프랑스 보호령 시절에는 프랑스 총독이 기거했으며 연회 장소로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일본 식민 통치 시절 덕수궁과 창덕궁 등이 많이 훼손되어 일제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던 사실이 생각나서 씁쓸하다.
Bahia궁에서 오른쪽으로, 카펫이 걸려있는 골목을 지나면 사이드의 집이란 뜻의 Dar Si Said가 나온다. 지금은 박물관 Museum of Moroccan Art으로 사용하는 이 곳은 고관이었던 bou Ahmed의 형제인 Si Said가 살았던 곳이다. 19세기 말에 세워진 건축물로 카펫과 가죽, 도자기 등의 모로코의 수준 높은 공예품을 만날 수 있는데, 푸른색의 문양이 들어간 청화백자가 발을 멈추게 한다.
이란의 카샨에서 수입해 온 코발트블루는 이곳에서 볼륨감이 있는 도기의 몸체에 칠해져 ‘페스 블루’로 불리며 발전했다. 푸른색 문양의 도자기는 목이 길고 주둥이가 크며 문양이 다르지만 조선의 청화백자와 전체적인 분위기는 많이 비슷하다. 조선의 청화백자도 카샨의 코발트블루를 중국을 거쳐 수입해서 사용했었던 것을 생각하면 문화의 흐름이란 거역할 수 없는 쓰나미와 같은 것이다.
800년간의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문화와 같은 문화권이었던 이곳은 이스파노 모레스크Hispano moresque 도자기의 원산지다. 18세기 초 독일의 마이센에서 백색 도자기를 생산해내기 전까지 강도가 높은 백자를 생산해 내는 곳은 세계에서 중국과 한국뿐이었다. 하지만 이스파노 모레스크의 영향은 마욜리카 섬을 거쳐 중국의 도자기를 동경하는 이탈리아 및 온 유럽으로 퍼져나갔으며 급기야는 백자 생산에 성공하게 된다.
청화백자를 한참 들여 보다가 시원하게 열려있는 중정으로 나왔다. 때로는 하늘을 담을 수 있는 분수가 있는 넓은 거실 공간이 명쾌하게 개방되어 있다. 아, Dar Si Said 자체가 예술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