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을 외우고, 시공을 뛰어넘어

#03 – 티베트 이야기, 보미波密

by 그루

밤새 보미 주민들에게 숨겨놓은 멋진 복숭아꽃 마을을 알아봤는지, 한족 기사와 가이드 몐빠는 아침부터 상큼한 아침 공기처럼 자신감이 넘친다.


찾아가는 마을


찾아가는 마을은 318번 도로를 타고 란우호 가는 방향으로, 보미 현에서 멀지 않은 파룽짱보강 옆에 위치한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눈에는 마을 입구가 막다른 길처럼 보인다. 티베트에서 외부인은 환영을 못 받는 것을 알기에 쭈뼛거리는 마음을 안고 마을로 천천히 들어서니 아!, 시야에는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설산을 배경으로 쏟아져 내리는 아침햇살 때문인가, 넓게 펼쳐진 마을에는 거대한 횃불의 행렬처럼 복숭아꽃이 조명을 밝혔다.

내 눈에는 횃불처럼 보였다. 복숭아꽃나무들


주문을 외우고 시공을 뛰어넘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색깔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동구 밖에는 아침에 출근하는 생명들로 바쁘다. 지나가는 소와 돼지들에게 아는 척을 하니, 텃세를 부리듯 시큰둥하다. 오히려 마을 분들은 “짜시델레~” 인사를 하면, 아침부터 마을에 허락도 없이 침입한 외지인을 스스럼없이 반겨준다.


긴 겨울을 보내고 봄이 왔지만 담 자락에 켜켜이 쌓아놓은 땔감들이 담장보다 높다. 담장 아래는 티베트에서 보기 드문 통통한 닭들이 모습을 드러내고(닭을 잡아가는 동물들 때문에 집 안에서 키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침시간이 살짝 지난 시간이지만 뉘 집 굴뚝에서는 게으른 연기가 피어오른다.


모든 생명들이 동구 밖으로 나오는 시간, 이곳에서는 가축들도 제입에 풀칠은 직접 한다.
담 자락에 켜켜이 쌓아놓은 땔감들


집집마다 텃밭에는 겨울을 난 청보리가 쑤욱 올라와 있어 녹색융단처럼 복숭아꽃과 설산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지극히 밝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묘하지만 마을을 방문한 두 시간 남짓 춤을 추듯이, 공기 중을 부유하듯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다녔다.

나는 샹그릴라나 무릉도원, 유토피아 같은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그런 곳에 흥미나 관심도 없지만, 그런 것이 있다면 내가 현재 있는 곳이 천국이고 샹그릴라요, 이상이라고 여긴다. 좋은 일이면 기뻐하고,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이 일어나도, 이것 또한 내 것이려니 하고 수용한다. 활동영역이 좁아서 나와 내 주변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을을 거니는 동안 ‘샹그릴라’를 떠올린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이상향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다.

청보리가 융단처럼 자라있다.


제임스 힐튼의 '샹그릴라'


20세기 영국의 소설가인 제임스 힐튼James Hilton(1900~1954)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에 의해 만들어진 단어인 샹그릴라Shangri-La는 책이 발표된 이후 탐험가나 여행가, 학자들에게 줄곧 회자되는 단어였으며 지금은 이상향을 뜻하는 명사가 되어버렸다.

미국인 식물학자이기도 한 탐험가 조셉 록Joseph Rock은 지금의 윈난 리장에서 27년간 머물며 티베트를 탐험했다. 그는 1928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 아름다운 티베트 사진과 기사를 올렸으며 그의 기사에서 영감을 얻은 제임스 힐튼은 1933년 ‘잃어버린 지평선’을 발표한다.


묘하게도 조셉 록이 사진을 올렸던 시기인 1928년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번영하던 미국 경제가 추락하면서 경제 공황이 시작되는 시기였으며, 제임스 힐튼이 잃어버린 지평선을 발표한 1933년은 유럽까지 번진 세계 경제 공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시기였다.

누구를 막론하고 너 나할 것 없이 각박한 현실을 살아내기가 힘들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조셉 록이 올린 한 장의 사진과 기사는 천국의 환영이었으며, 제임스 힐튼은 그것을 모티브 삼아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유토피아를 그려낸 것이다.

모든 이에게는 불행한 시간이었지만, 시절이 인물이나 스타를 만들어낸다는 말이 맞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제임스 힐튼의 소설은 1937년 프랭크 카프라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https://brunch.co.kr/@madder/193


샹그릴라는 어디인가?


그렇다면 과연 티베트 불교에서 베율Beyul이라고 부르는 샹그릴라는 어디인가? 배율은 티베트불교를 정립한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가 말한 전설의 비경으로, 히말라야 여러곳에 숨겨져 있다고 전해진다.

중국 정부는 1997년 윈난 성 중디엔中甸을 ‘샹그릴라’라는 지명으로 바꿔버렸다. 하지만 누구도 그곳을 힐튼의 샹그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폭력, 살인 등이 없는 티베트 쿰부 지역이라고도 하며, 설인 예티가 살았다랑탕계곡이라고도 한다. 많은 이들은 티베트 동쪽 쓰촨 성 야딩亚丁을 조셉 록이 찍은 사진 상의 샹그릴라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주장하는 샹그릴라는 바로 이곳 얄루짱보강이 있는 얄루짱보대협곡 근처라고 한다. 1990년대 말에 외국 탐험가의 탐사가 시작된 이곳은 에베레스트와 비견되는 협곡으로, 현재는 탐사는커녕 중국인도 허가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베율이 어디든, 샹그릴라가 어디든, 상관없지만, 쓰촨 성 야딩과 4월의 꽃으로 가득한 얄룽짱보강 유역의 길들을 헤집고 쏘다녔으니 그 시간들이 진정한 샹그릴라가 아니었나 싶다.

란우호然乌湖

318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란우진에서 오른쪽(남쪽)으로 꺾어지면 란우호가 위치한다. 주소 상으로는 빠수현이다. 아름다운 이 길은 차마고도의 옛 길이었으니 옌징을 지나 빠수에서 밤을 지내고 보미로 향하는 마방들은 이 호수 변에서 말들에게 물도 먹이면서 한숨 쉬어갔을 것이다.

란우호 주변으로는 설산들과 크고 작은 빙하들이 많다. 그래서 당연히 빙하호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의외로 산사태나 화산 때문에 하천의 퇴적 작용 등으로 골짜기나 물줄기가 막혀서 생긴 호수인 언색호堰塞湖라고 한다. 호수 변에 널려있는 투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고 거대한 바위 덩어리들은 호수의 태생을 말해준다.

주변은 거칠고 거대한 바위 덩어리들이 많아 호수조차 남성적인 기운이 넘쳐 보인다.

인적이 없는 검게 보이는 짙은 숲 때문일까, 50m나 된다는 깊은 수심 때문일까, 4월의 란우 호는 더없이 기운이 강하고 충만해 보인다. 야크일까, 검은 털이 있는 머리와 커다란 뼈다귀만 남아있는 사체가 호수 변에 외롭다. 타슈쿠르칸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빙하호 카라쿨 호수가 생각나게 하는 깊은 위엄이 서려있다. 호수는 끝이 없이 길게 누워있다. 호수의 길이가 29킬로 미터라니, 란우 호만 따라 걸어도 하루는 걸리겠다.


미퇴이빙천米堆冰川

란우호에서 보미 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들어가면 미퇴이빙천 입구가 나온다. 가볍게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곳이니 은근히 기대가 된다. 그동안 꽃길만 찾아다닌 터라 몸이 근질근질했다. 해발고도가 좀 높긴 하지만 4,000m도 되지 않으니 조심조심 걸으면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가이드 몐빠가 빙하까지 왕복 6시간 걸린다면서, 말을 타고 갈 사람은 말을 탈 수 있다며, 짐짓 너스레를 떤다. 까짓것, 6시간쯤이야 오랜만에 걷지 뭐, 하면서 걷는데, 입구에 있는 너와 지붕에 있는 미퇴이 마을을 지나 1시간 30여 분 걸으니 빙하 모습이 보인다.


날씨가 변화무쌍한 곳이기에 오후에 미퇴이 빙천에 갈 시간이 되면 하늘에 구름이 좀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빙하 입구에 하나밖에 없는 뷔페식 식당에서 중국 사람들과 어울려 허겁지겁 밥을 먹고 나도 하늘은 살짝 흐리다. 사진에 욕심을 부리지 않지만, 중국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빙하의 모습에 너무 기대를 했나 보다.


망했다!, 해발고도 6800m가 된다는 빙하의 하얀 주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하늘과 빙하 봉우리가 맞닿아있다.

빙하의 봉우리는 하늘과 닿아있지만, 해발고도 3800m의 호수는 아름답다.
미퇴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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