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룩 다운

지탱할 줄이 있다면 무섭지 않아

by 마이즈

땀을 뻘뻘 흘리며 은행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뭇가지에서 다른 가지로. 4미터 정도나 될까? 그리 높지 않은데도 아래를 보니 아찔했다. 나무 아래에서 조리사님과 주사님이 올려다보며 깔깔거렸다.


“아유. 나무 잘 탄다더니 완전 겁먹었네!”

“무서우면 그만 내려와요. 우리가 하게!”


이럴 리가 없는데? 어릴 때 살았던 집에도 큰 나무가 있었고 가장 위 가지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었다. 어릴 때는 잘 기어올랐던 것 같은데 왜 이러지? 고소 공포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결국 끝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왔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가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리사 아주머니 세 분이 서로 경쟁하듯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은행을 따기 시작했다. 군인이 뭐 저래? 역시 도시 총각은 안 되겠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초등학교에 간 군인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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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판 일용직 일을 하던 중, 한 아저씨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두어 시간만 하면 여기 하루 일당이 나오는 알바 있는데 생각 있어? 물론이죠! 그렇게 좋은 조건인데도 사람이 없나요? 다들 겁먹어서 그래. 자네는 겁이 많은가? 그럴 리가요. 일단 가봅시다! 돈을 많이 준다는데 무서울 게 있을까? 며칠 뒤 아저씨가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5층짜리 상가 건물이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건데요? 청소하는 거야. 근데 그렇게 많이 줘요? 외벽 청소 거든. 오. 그거면 되나요? 사다리차를 타고 올라가거나 소방 호스 같은 것으로 물을 쏘는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기대가 되었다. 잠시 후 착각임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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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 올라가 보니 양 옆으로 줄이 매달린 나무 판이 몇 개 있었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네 같았다. 끝 줄이 묶여 있지 않은 그네. 이 나무 판을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 대고 양 옆의 줄을 팽팽하게 당겨서 이쪽으로 줘봐. 응? 이게 뭐야. 이걸 타고 공중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하는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허공에 뜬 내 몸을 지탱하는 것은 나무 판 하나뿐이었고 두 개의 줄이 옥상에 매달려 있었다. 물론 한번 더 몸을 다시 묶어 고정하긴 했지만 전혀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판 옆에는 청소 도구를 담을 수 있는 작은 함이 붙어 있었다. 이제 와서 무섭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미 세팅까지 다 끝났으니까. 살다가 버티기 힘든 무서운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매번 똑같다. 먼저 하시는 분을 보며 그 분과 나를 가급적 같은 선상에 놓으려고 한다. 저분도 하잖아?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5층부터 외벽 청소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익숙해지니 좀 나았다. 제일 힘든 것은 힘을 주어 박박 문지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힘을 주면 내 몸이 건물에서 멀어지니까. 바닥에서 청소를 할 때와는 다른 감각을 가져야 했다. 위에서 아래로 보다는 아래에서 위로 닦을 때 힘을 준다. 그래야 내 몸이 벽에 바짝 붙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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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무서웠지만, 막상 한번 일을 끝내고 나니 자신감이 붙었다. 알바비도 최고였다. 고작 두어 시간 했는데 이렇게 받는다고? 이번에는 5층이었지만 층고가 높고 넓은 건물일수록 비용이 더 오른다고 했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인가 불려 갔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처음에 했던 나무 판이 가장 조악한 형태였고 제대로 고정된 편안한 방식도 있었다. 5층에서 8층, 10층짜리까지 진행했다. 항상 그렇듯 첫 순간만 잘 넘기면 그다음에는 문제없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니 놀이 공원의 높이 기반 어트렉션은 시시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높아도 제대로 안전장치가 고정되어 있는 거잖아? 혹시 사고가 나서 대롱대롱 매달리는 경험을 했더라면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매번 안전하게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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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벽 청소를 함께 하는 분들과는 친해질 수 없었다. 내가 어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모두 개인플레이였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각자 업무가 나뉘어 누군가가 솔질을 하면 누군가가 물을 뿌리고 누구는 스티커를 제거하는 등의 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그럴 때에도 업무적인 말 이외에는 딱히 말을 섞지 않았다. 거기 다 했어? 아직 이요. 저쪽은? 지원 더 필요해? 일용직 공사판 일처럼 장시간 함께 하는 일도 아니었고 다들 일을 마치면 빠르게 돌아갔으니 더 그러지 않았을까? 물론 술을 좋아하는 분들끼리는 뒤풀이를 가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는 항상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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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은행나무 아래에서 망신을 당한 날. 야간 순찰을 돌고 숙직실에 돌아간 나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운동장을 향했다. 나무를 타지 못했던 것이 은근히 분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연습을 하면 다음 기회에 원숭이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첫 번째 가지까지 기어 올라갔다. 바닥을 내려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도 없는 초등학교 운동장이었기 때문일까? 음. 무서운 건 아니야. 하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전혀 연습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높이가 느껴지지 않잖아? 이상한 핑계를 대며 숙직실로 돌아갔다. 나의 남은 여생에 나무에 오를 일은 부디 없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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