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게는 죽지 말아라
동생은 일본에서 멋진 여성과 결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생겼다. 코로나를 겪으며 한동안 보지 못했기에 멀리에서 축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회사를 그만두게 되며 여유가 생겼다. 조카도 보고 동생이 사는 모습도 볼 겸 겸사겸사 일본 여행을 계획했다. 동생에게 일정을 문의했는데, 마침 아버지도 기계 전시회 참여 문제로 일본에 올 예정이라고 했다. 셋이 같이 만나고 싶다는 동생의 강력한 요청으로 결국 아버지와 같은 날을 잡았다. 아키하바라에서 동생의 차에 픽업되어 빅사이트의 기계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아버지까지 픽업한 뒤 동생의 집으로 이동했다. 조카와 처제, 동생이 키우는 동물 가족에게 인사를 건네고 잠시 머물렀다. 저녁 시간이 되자 조카가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슬슬 잘 시간이라고 한다. 동생은 다시 우리를 태우고 호텔로 이동했다.
집보다는 호텔에서 자는 편이 좋을 거라고 했다. 새벽에 아기가 자주 깨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한데, 아내도 우리가 있으면 신경 쓸 것 같다는 동생의 의견이었다. 그래. 그 정도 배려심은 있어야지. 훌륭하다. 문제는 호텔로 이동한 다음이었다. 미리 객실을 잡아두겠다는 말은 들었는데, 객실이 하나뿐이었다. 아버지와 한 방에서 자라고? 거의 30년 만인 것 같은데? 한 때 지독하게 증오하기까지 했던 분이셨다. 지금은 나를 살린 사람이지만. 동생은 무슨 생각으로 방을 하나만 잡은 걸까? 친해지길 바라 같은 이벤트를 의도한 걸까? 아니면 단순히 돈이 없었기 때문일까? 마음이 복잡했지만,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방에 들어가자마자 어느 쪽 침대를 사용하실 거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창가 쪽을 원했다. 나는 일찍 잠드니까 너는 편하게 왔다 갔다 해라. 그럼 먼저 씻으세요. 피곤하실 텐데 일찍 주무셔야죠. 아버지는 옷을 벗었다. 속옷 차림의 아버지는 깡마른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니 자연스럽게 그동안 묻어둔 말이 나왔다. 배는 괜찮아요? 아버지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되물으셨다. 무슨 말이냐? 그냥요. 아버지는 정말 잊은 걸까? 모른 척해주시는 걸까?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집에 오셨다. 몇 년 만에 보는 모습인지 모르겠다. 우리를 빚더미에 던져두고 사라진 사람. 눈에 띄면 죽여버리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던 그 사람. 하지만 아무 짓도 할 수 없었다. 경계심 가득한 나와는 달리 동생은 아버지를 반겼으니까. 기억 속의 그날은 어쩐지 노이즈가 가득한 흑백으로 남아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셨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거실에서 그 둘을 지켜봤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지배했다. 잠시 후, 어머니의 외침과 비명, 눈물이 보였다. 아버지도 소리를 쳤고 어머니를 향해 손이 올라가는 듯했다. 다음 순간, 나는 아버지 품에 안겨 있었다. 내 손에는 부엌칼이 들려 있었다. 항상 칼을 들고 다녔지만 사람 몸에 직접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중딩 느와르) 아버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컥 하는 외마디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현관문으로 나가버렸다. 마치 친절한 배웅이라도 하듯 아버지의 등 뒤를 따라갔다. 피를 많이 흘리면 닦기 귀찮은데. 숨 좀 참아보시지요. 하는 기괴한 생각을 하며 아버지의 발 뒤꿈치만 바라보았다. 동생은 그날 이후 오래도록 말을 잃었다. 아무리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한 순간 참지 못한 내 탓이었다. 역시 감정이란 것은 쓸모없어. 한 동안 불안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일하는 중에도 경찰이 나를 체포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신고하지 않은 걸까? 어째서?
아버지가 옆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밤늦게까지 닌텐도 스위치로 게임을 했다. 혹시나 주무시는데 방해가 될까 싶어 라이트를 줄이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시끄러울까 싶어 조작하는 소리가 잘 나지 않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했다. 아버지는 코를 곯았다.
아침 7시가 되자 동생이 왔다. 오늘은 조카와 함께 동물원에 갔다가 동생 집에서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아버지는 손주를 안아보고 손을 잡고 걷기도 했다. 평생 처음 보는 듯한 아버지의 행복한 표정이었다. 재혼하신 집에도 손주가 있으시잖아요?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이 애는 내 핏줄이잖아. 그 애들도 좋지만 다르게 좋구나.
장난감 백화점에 가서 조카의 선물도 사고 동생이 예약한 고급 음식점에서 식사도 했다. 모든 일정이 끝난 뒤 호텔 근처 카페에서 동생과 셋이 시간을 보냈다. 우리 관계에 이런 날이 다시 올 거라고는 절대 상상하지 못했다. 망쳐 놓은 것은 아버지와 나였고, 관계를 회복시킨 것은 아버지와 동생이었다. 나는 그저 망가뜨릴 뿐이었다. 역시 다크 사이드. 나는 어둠의...
마지막 날 조식을 먹으며 아버지와 대화를 했다. 회사는 어떻게 되었나요? 재혼하신 분은 잘해주시나요? 그 집 아이들은 어때요? 이야기를 나누며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많이 풀 수 있었다. 어린 내가 살아가기에 기댈 곳이 없다면 강렬한 목적이라도 필요하지 않았겠냐고. 본인의 억울함을 그동안 말하지 않은 채 나의 증오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계셨다. 어린 시절 시달린 빚은 어머니가 만든 것이라는 말도 하셨다.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가업 승계 이야기도 결국 나를 위해 진행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멈춰버린 게임 라이프) 조금 더 안정적인 기반에서 편하게 살기를 원하셨던 거겠지.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시간 관리가 너무 빡빡하지 않냐. 그렇게 살면 힘들지 않냐. 나이 들고 나면 노력만 하며 시간을 보낸 것을 언젠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아버지가 보는 세상이겠지요. 뭐, 그래도 이해는 갑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오해가 있었다. 사자는 자식을 절벽에서 떨어 뜨린다고 했던가? 빚더미와 가난한 삶, 그리고 증오할 대상이 되어 준 덕분에 나는 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버틸 수 없는 밑바닥에 빠진 순간, 나를 구해준 것은 결국 아버지였다. 그 이후 내가 쓴 책을 통해 나를 이해했고 동생의 계략을 통해 결국 화해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날의 여행으로부터 수년 전, 광주의 어느 모텔. 욕조에 물을 받고 그 옆에 칼을 두었다. 그리고 마지막 해야 할 일을 했다. 혹시 모르기에 종이에도 유서를 썼고 이 메일도 예약 발송을 걸어 두었다. 누군가에게는 저주를, 누군가에게는 감사와 미안함을. 세상 사람들은 나를 마녀 사냥 했고 믿었던 이들에게는 배신당했다. (아홉번의 실수) 어느새 사채까지 쓰게 되자 돈을 갚으라며 그들이 집에까지 찾아가는 일이 생겼다. 어머니에게는 몇 달째 생활비도 보내지 못해서 집에 있는 것들을 팔며 생활비를 마련하고 계셨다. (어머니라는 업) 할아버지는 결국 실버타운으로 들어가셔야 했다. (어느 제주 소년의 일생) 지원 사업은 완수되지 못해서 환수금이 발생했는데, 심지어 기관으로 투서까지 들어가며 사업 진행조차 못하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강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다. 내가 살아있음으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느껴졌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욕조에 들어 가려다가 문득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음이 떠올랐다. 다른 것은 모르겠고, 내가 사라졌을 때 동생을 한국으로 끌고 들어와서는 안된다. 적어도 그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PC를 켜고 싶지는 않아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저 죽으려고요.”
“그래.”
“이거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제가 죽고 나서 동생을 회사로 데려가시거나 하지는 마세요. 그 애는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놔두세요.”
“그래.”
“그럼 안녕히 계세요.”
“네 목숨 네가 끊겠다니 말릴 생각은 없다. 그런데 한 마디만 하자.”
이어진 한 마디는 나를 살렸다. 긴 충고나 설득이 아닌 단 한마디였다.
“억울하게 죽지는 말아라.”
전화를 끊고 침대에 쓰러져 울었다. 욕조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밤새 그 한 마디가 맴돌았다. 억울하게 죽어 저주가 되는 것도 나름 멋지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채 복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저 혼자 뒤집어쓰고 끝나는 거라면? 저주도 되지 못한 채 그냥 사라질 뿐이라면? 결국 나는 준비해 둔 것을 실행할 수 없었고 다음날 아침 일찍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 6시인데도 아버지는 생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섣불리 전화하지 않고 그저 밤새 기다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억울하게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