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를 위해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말,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드라마나 영화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듣기 어려운 말은 아니죠. 하지만 첫눈에 믿게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나요. 아마 그런 말을 들어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믿음은 꼭 붙어 다니는 짝꿍 같기도 하고, 때로는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하지만 저 '첫눈에'에 대입해 보면 둘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최근에 단순한 사건을 하나 겪었어요. 어느 정도로 단순하냐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어요. '갑자기 그 사람이 나를 반가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보통 이 경우에는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이유를 알 수도 있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 정도만 하기도 하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죠. 그 생각의 차이는 무엇에서 비롯되는 걸까요. 바로 믿음이 아닐까요.
꼭 연인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선의로 유지하는 관계의 바탕에는 사랑이 깔려 있다고 생각해요. 그중에는 오랜 기간 지속된 관계도 있을 거고, 급속도로 가까워진 관계도 있을 거예요. 보통 관계의 농도가 짙어지는 데에 기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들 해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믿음이란 첫눈에 이루어지지 않기에, 그것을 쌓아가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죠. 그러면, 사랑은 충만한데 아직 믿음이 따라오지 못했다면 어떡할까요. 아마 제가 겪은 사건에서 그 딜레마를 느꼈던 것 같아요.
급속도로 가까워진 관계였어요. 공통 관심사도 많고, 가치관도 비슷하고, 삶의 고민도 비슷했어요. 그래서 큰 호감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저 간단한 사건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던 거죠. 왜 저러지? 내가 뭔가를 잘못했나? 그래도 저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부아가 치밀었죠. 나도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을 거라고 우스운 다짐까지 해버렸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내 오랜 친구 H가 저런 행동을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저는 그 이유를 금방 눈치채고, 믿고 기다렸을 거예요. 또 K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오히려 그 친구가 절 필요로 한다는 걸 알았을 거고요.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던 거예요. 사랑은 크지만 믿음이 그 사랑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고, 그 빈 공간을 추측과 의심으로 채웠던 거죠. 미안했어요. 어쩌면 저의 오해에 불과했을 수도 있고, 나중에 알고 보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그 단순한 일로 상대방이 사실은 별로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쉽게 의심했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게 된 사람이면 일단 믿어보자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솔직히, 앞으로도 저는 저럴 것 같거든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너무 성급하게 마음을 주고 가까워지지는 말자는 해결책을 내렸어요. 모든 사람이 이럴 필요는 없지만요, 적어도 소심한 저에게는, 사랑과 믿음이 비슷한 속도로 진전되지 않는 관계는 괴로움을 동반하는 것 같아요. 좋은 사람들을 의심하고 싶지도 않고, 좋아질 수 있는 관계를 성급하게 변질시키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천천히, 조금만 더 천천히 가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