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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막 불길에 타버린 사랑(2)

불의 나비 81화

by 매화연

*


곧 일정이 잡힐 연구 계획의 세분화를 진행하던 때였다. 뇌를 스쳐 지나가는 당신에 대한 생각에 바쁘게 움직이던 펜이 우뚝 멈추며 한순간에 집중력이 처참히 깨졌다.


“……하.”


또 이러는군. 사적인 감정에 업무에 지장이 생기면 안 되는데…… 이 대표한테 조언이라도 좀 받아야 되나.

“대체 그 자식은 어떻게 그렇게 감정을 숨기고 냉철하게 사는 건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다시금 펜을 움직이려 하려던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조심스레 천천히 열린 문 너머로 오른쪽 가슴팍에 ‘JI 연구소’라는 초록빛 자수가 박힌 새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JI 연구소의 연구원 몇몇이 문턱 앞에 빼꼼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최 소장님. 김현규 연구원입니다.”


“박나윤 연구원입니다.”


“신아영 연구원이에요. 바쁘실 텐데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쭈뼛쭈뼛 말을 건네는 세 명의 연구원들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아닙니다. 연구실까지는 무슨 일이에요?”


자잘한 연구는 연구실 안쪽에 놓여진 실험실에서, 규모가 큰 연구만 연구소에 직접 가서 연구원들과 진행하기에 딱히 연구원들이 내 연구실로 올 만한 일은 없었다. 나도 큰 연구와 가끔 있는 감사를 진행할 때만 연구소에 가기 때문에 나랑 크게 접점이 있을 만한 연구원은 극히 드물었다.


“아, 저, 그게 말이죠…….”


서로 눈치만 볼 뿐 그 누구도 후의 말을 먼저 꺼내지 못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멋쩍은 공기를 보다 못한 박나윤 연구원이 목소리를 내보였다.


“최 소장님, 생신 축하드려요!”


어느새 연구실 안으로 발을 들인 박나윤 연구원의 힘찬 목소리와 자신감 있게 나를 향해 쭉 뻗은 손에 비해 그녀의 두 눈은 꼭 감겨 있었다.


“아이구, 이게 뭐예요. 뭘 선물까지.”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박나윤 연구원의 건네는 종이가방을 받았다. 슬쩍 안을 보니 한눈에 봐도 몹시 달아 보이는 마카롱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소장님이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고민하다 자녀분들이 마카롱 집에 자주 가는 걸 봤거든요. 그래서 일단 마카롱으로 준비를 하긴 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우리 애들이 워낙 단 걸 좋아해서 말이지. 이건 애들 줘야겠군.


“최 소장님, 저도 작게나마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생신 축하드려요.”


“별 거 아니지만 제 것도 받아주세요. 생신 축하드립니다!”


연이어 김현규 연구원과 신아영 연구원도 잇따라 선물을 건넸다. 각각 향수와 종합 영양제였다.


“다들 감사합니다.”


마땅히 기념할 날도 아닌데 너무 과분한 선물을 받아버렸군.


“그럼 다른 연구원들도 계시니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소장님.”


다른 연구원들?


“네, 다들 수고하-”


연구원들이 문을 여는 순간 문밖에 바글바글하게 서 있는 JI 연구소 연구원들의 모습에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최 소장니임…….”


다들 양손 가득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들고 있었다. 연구원 모두 눈꼬리를 내린 채 내 눈치를 조금씩 보고 있었다.


“……아, 하하……, 다칠 수도 있으니까 한 분씩 천천히 들어오시죠.”


끊이지 않는 선물들과 축하 인사에 한 분 한 분 정성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한바탕 시끌벅적했던 순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 뒤 다시 고요를 찾을 때서야 나는 선물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각종 영양제에 홍삼, 비싼 와인과 여럿 디저트, 다양한 책들과 상품권까지.


대체 다들 오늘이 내 생일인 건 어떻게 알고 선물을 준비한 걸까. 내 생일인 오늘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모두 그렇게 안절부절못한 채로 축하의 마음을 전한 것이겠지. 태어났음에 이렇게 깊은 축하를 받기 마땅한 사람이 아닌데.


“아, 맞다. 우리 애들이 준 거.”


한가득 받은 선물들을 가지런히 한 곳에 정리해 두고 안쪽에 고이 놔둔 큰 종이가방을 조심스레 열어 보았다. 출근길에 우리 아이들이 꼭 연구실에 가서 혼자 있을 때 열어보라고 똑똑히 당부했던 종이가방 입구 쪽에 붙여져 있는 테이프를 천천히 뜯었다.


가방 안에는 반듯이 포장된 JI 지갑과 목도리, 시계, 그리고 자그마한 쪽지가 들어있었다.


“이 녀석들이 돈이 어디 있다고…….”


명품 중에 명품이라 불리는 브랜드, 그것이 바로 JI였다. 꽤나 비싼 축에 속하는 것이 아닌 감히 엄두도 못 낼 금액을 자랑하고 있지. 내가 매번 이 대표에게 대단히도 비싼데 어떻게 이렇게나 인기를 얻을 수 있냐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타박할 정도였다.


나는 가장 위에 얹어있던 쪽지를 꺼냈다. ‘HAPPY BIRTHDAY’라는 글자와 함께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카드였다. 이현이 취향이 지극히도 고스란히 녹아든 카드에 피식 웃으며 뒤집어 보았다.


‘생신 축하드려요, 아버지.’


‘아빠 생신 축하해요!’


‘아빠! 내가 고른 목도리 예쁘지? 나 잘 골랐지? 히히, 생신 축하드려요!♡’


카드 뒷면에 적힌 익숙한 서체들이 가슴을 울렸다.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차마 목소리로 담을 수 없었던 말들을 적어서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어린 마음들에게 너무도 미안하였다.


“……내 새끼들, 이쁘기도 하지.”


애써 꾹 누르고 있던 그리움이 주체할 수 없이 힘차게 솟아올랐다. 당장이라도 본부로 달려가 아이들을 보고 싶었다. 꼭 안아주며 마구 머리를 쓰담아주고 볼을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우리 예쁜 아가들, 아침에도 보고 왔고 퇴근하고도 볼 거지만 지금 당장 또 보고 싶네.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을 억지로 접은 뒤 다시 아이들이 전해준 선물을 안전한 곳에 소중히 보관해 두었다. 몸을 돌려 쓰고 있던 연구 계획 세분화를 이어가려던 그때였다.


“어우, 깜짝이야…….”


문득 시선에 들어온 연구실의 문은 어느샌가 활짝 열려 있는 상태였고, 그 사이에는 벽에 기댄 채 웬 장미꽃 한 송이를 입에 물고 있는 이가 한 명이었다.


저거 드디어 미쳤나?


“훗.”


뿌듯하게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살며시 몇 번 끄덕이는 이신을 보자 절로 인상을 썼다.


“훗은 개뿔.”


“아,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입에 물고 있던 꽃을 손에 들고는 이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바쁘다.”


간단히 책상을 정리하며 이신에게 말했다.


“와, 지금 업무 보실 시간은 있으시고 이렇게 이쁘고 깜찍하고 사랑스럽고 섹시한 최 소장님의 하나뿐인 너무도 소중한 저, 박 비서에게 쓸 시간은 없으신 겁니까? 저보다 일이 더 중요한 겁니까? 진짜로? 정말? 와아아…… 진짜 진짜 섭섭합니다. 저 삐져요? 예?”


“용건만 말해라, 박 비서.”


“하, 이거 너무하시네. 몰라요. 저 그냥 울 거예요.”


더 하면 진짜 삐지겠는데.


“알았다, 알았다. 왜, 무슨 일인데 그러냐?”


잠시 나를 노려보던 이신이 내 한 마디에 다시금 금세 자신만만한 웃음을 되찾고는 연구실 안으로 발을 들이며 슬쩍 몸을 비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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