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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불 앞에 선 아이

머뭇거리는 노랑 - 4

by 마음부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소심하고 조용한 아이였다.
이웃 아주머니들이나 친척 어른들은 하나같이 나를 보고 말했다.
“참 순하네. 순둥이야.”
“착하네. 보채지도 않고 말썽도 없고.”


원래 그런 성격도 있었겠지만,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다.
같은 여자임에도 할머니는 손녀란 존재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실수쯤으로 여겼다.
딸은 하나도 쓸모없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할머니 밑에서 엄마는 딸만 넷을 낳고 참 모진 시집살이를 견뎌내며 사셨다.


나는 집 안에서조차 크게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딸 넷 중 셋째.
숨죽여 웃고, 눈치로 말하고, 웬만하면 존재감을 지우고 지냈다.

그 와중에 바로 위 언니는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씩씩하고 말괄량이 같았다.
남자애처럼 행동했고, 잘생겼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언니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고, 나는 더더욱 기를 펴지 못했다.
겨우 1년 차이로, 그것도 또 딸로 태어난 나.

언니는 씩씩하게 웃을 줄 알았고, 나는 조용히 사라질 줄만 알았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성적이었던 데다 눈에 띌 만큼 공부를 잘하지도, 예쁜 편도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아이.
기억에 남지 않는 아이.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참 외로웠을 텐데,
그 어린 마음이 어떻게 6년을 버텼을까 싶다.


요즘처럼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많은 시간들을 나는 도대체 뭘 하며 보냈을까.

집은 넉넉하지 않았고, 공부를 봐주는 어른도 없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장면 하나가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그 시절엔 구구단을 외워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선생님은 수업이 끝날 무렵, 학생 하나씩을 일으켜 세워 구구단을 외우게 했다.
그날 외워야 할 단을 못 외우면 남아야 했다.


나는 어김없이 걸렸다.

외우지 못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교실에 남아
바닥에 왁스칠을 했다.
걸레를 바닥에 대고 손으로 문지르며 구구단을 외웠다.
“오이십오… 오육삼십… 오칠… 오칠…”

삐걱, 삐걱.


왁스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윤이 나도록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이쪽에서 밀고 저쪽으로 갔다 오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걸레질을 하던 손목은 점점 무거워졌고, 다리엔 힘이 풀려나갔다.
마치 내 마음이 쓸려 나가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는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소리.
그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친구들은 선생님께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교실 문을 빠져나갔다.
나는 무엇을 망설이며 머뭇거렸을까.


아마 집에 도착했을 땐 해가 꽤 기울어졌을 것이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팔이 아팠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도.
어떤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는,
작고 축축한 감정 하나가 가슴 한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생일날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엄마가 미역국에 평소보다 한두 가지 반찬이 더 올라간 밥상을 차린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작고 하얀 케이크에 초를 꽂아 축하하는 모습은 없다.


할머니가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딸년 생일은 뭐 하러 챙기냐”며 엄마에게 싫은 소리를 한다.

나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봤다.


그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릴 때 나는 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머뭇거렸다.


울지도 못하고, 화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마음을 접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부터 늘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신호등은 늘 노란불이었다.
건너야 할지, 멈춰야 할지
마음속엔 매번 같은 물음표가 맴돌았다.


이제는 건너가고 싶다는 마음에 노란불이 깜박거린다.


초록불은 한참 후에야, 나에게 켜졌다.



<이미지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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