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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Sep 09. 2020

굽은 나무가 지켜주는 것

세상의 분류표 안에 자리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덕경> 20장 속인찰찰 아독민민 俗人察察 我獨悶悶
: 세상 사람들은 잘도 살피는데, 나만 유독 답답하구나. 세상사람 모두가 총명한데, 나 홀로 흐리멍덩, 답답하구나.


변변한 직업을 가져보려 애쓰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고 고상한 삶을 추구하고 산 건 아니다. 이것만큼은, 하며 특별히 어딘가에 가치를 두지도 않았고, 절대로 이것만큼은, 하며 자존심의 배수진을 쳐 놓지도 않았다. 학생 때는 장례희망 같은 걸 갖고 있어야 진학 상담을 할 수 있었기에 교사에게 던져 줄 ‘목표 지점’ 하나는 갖고 살았다. 그러나 내 삶의 방향에 있어선 최종 결정을 차일피일 미뤄왔다. 미루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루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나로선 그걸 빨리 알아차린 게 다행이었다. 목표 지향적으로 총명하게 사는 건 애초부터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뭔가를 써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추구하는 바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내가 받은 수능 성적에 행운이 보태지면 서울 중위권 대학의 법대를 쓸 수 있을 것 같아 담임과 말을 맞추고 왔는데, 민주가정의 회의에서 그 합의를 결렬시켜 버렸다. 가장 아름다운 20대의 날들을 어둡고 눅눅한 고시원에서 보내서는 안 된다는 대전제가 세워졌고, 거기에 현실적인 부분들이 보태지다 보니 국문과로 낙점되었다. 덕분에 20대 내내 해 잘 드는 벌판을 헤매 다닐 수 있었지만, 20대 후반이 되어 누구든 문턱을 넘어서면 동정심이 드는 3분의 2 지하 어둡고 눅눅한 자취방에 살게 된 것도 자연스런 인과였다. 그때 막 마무리한 글이 그간 나다니며 끼적여 놓은 파편들의 짜깁기, 여행기였다. 그게 출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정규 직업이 없다는 고독한 일상 덕분이었다. 



대학 졸업도 못했고, 입사 서류에 쓸 만한 변변한 경력 한 줄 없어 과외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그게 업으로 굳어가던 시점, 시인이자 교수였던 선배가 범계역에 있는 IT회사 홍보팀에 나를 소개해 주었다. 누누이 들은 바, 오늘은 간단한 인사, 내일은 출근. 입사가 확정된 면접이었다. 그게 나의 첫 번째 면접 탈락 경험이었다. 도대체 그 따위로 면접을 보는 놈이 어디 있냐고 핀잔을 주는 선배의 전화를 받으면서도 ‘그 따위’가 만들어지는 지점이 어디였는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


“너 인마, 네가 되물었다며? 네가 뭔데 면접관한테 되물어?”


인사만 한다는 면접관들이라도 자기들 회사의 비전이나 방향 같은 것, 회사 홈페이지에 나온 것 정도는 물어 볼 거라 생각해 회사 소개 몇 줄을 외워 갔다. 여기까지는 준비된 사원, 화기애애했다. 마지막 질문은 내 입사의 동아줄, 나를 소개한 선배의 고향 선배라는 분이었다.


“여기 굽은 나무 한 그루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굽은 나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뭐지, 편하게 이야기하다 오면 된다면서, 이 사람이 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거지?


“나무가 어디서부터 ‘굽었다’로 규정되는지 확정하려면 사람마다 기준이 동일해야 하는데, 굽은 정도는 모두 상대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므로 그 기준, 임계점을 계속해서 뒤로 미루고 보류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는 '굽었다'라는 판단이 멈춰 버리는 겁니다. 바깥 사물은 제 인식, 판단과 별개로 존재하므로 그걸 굽었다거나, 곧다거나, 제가 판단할 필요는 없는 거지요. 그리고 솔직히 굽었든 안 굽었든 그건 제가 나무를 보는 기준이 아닙니다. 저한테는 나무가 멋지다, 아름답다라는 관념이 더 가깝습니다.”


잠시 정적. 말을 더 해야 하나? 그래서 물었다.


“회사 면접 자리에서 이런 질문이 오가는 게 흔한 일인가요? 제 나름 대답을 하긴 했는데, 대답이 너무 형이상학적이었지요?”


형이상학, 내 인생에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발음해 본 게 몇 번이나 된다고, 왜 그런 단어를 내뱉었을까, 간지럽다, 부끄럽다, 스스로 뺨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나의 ‘그 따위’는 단어 선택이 아니라 되묻는 행동에 있었다.



두 번째 면접 탈락의 과정도 매우 흡사했다. 또 다른 선배의 절대적 합격 보장으로 진보 문화단체에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 끝나고 같이 낮술이나 한 잔 하자. 내일부터 나와 일해. 요새 너무 바빠. 그게 그날의 수순이었다. 


“어떤 작가를 좋아합니까?”


단체의 대표가 물었다. 


“성석제, 윤동주, 백석을 좋아하는데, 요새는 박민규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단편들이 꽤 재밌어요.”


“그리고요?”


“사실은 외국 작가의 글을 더 좋아합니다. 슈테판 츠바이크, 조지 오웰. 이분들이 쓴 에세이나 평전을 가장 좋아합니다. 요새는 마르께스나 이탈로 칼리노 같이 환상과 현실이 구분이 되지 않는 소설도 많이 읽습니다.”


"또 없어요?”


“제가 대답하길 원하는 작가가 따로 있으신가요? 황석영, 고은 같은?”  


면접은 끝났고, 낮술은 없었다. 누가 ‘저 따위’ 인간을 불러 온 거냐고, 선배가 욕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 나는 조직 사회에선 ‘그 따위’ 대답이나 하는 ‘저 따위’ 인간이라 판명 났다. 인간 사회 생물학 종 구분에서 굽은 나무 종으로 처분되었던 것이다. 사회생활은 텄고, 뭔가를 쓰면서 공복을 참아 보자 머리를 싸맬 의지를 다졌지만, 머리를 싸매는 이유는 오로지 숙취였다. 




뭔가 처음 써 보려 시도했던 장르는 여행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평론까지는 아니고, 음반을 사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음반 소개 정도를 목표로 삼았다. 곡, 앨범을 장르 분류표에 적절하게 배치시키거나, 이도 저도 모호할 때는 새 이름을 만든다. 분류를 위한 서술만 하면 될 뿐, 음악 자체를 분석할 필요까진 없다. 직업, 꿈, 목표, 성공적 삶이란 사회 분류 체계 안에 분포되는 것이므로, 음악가도 예술가 칭호와는 별도로 시장에 자리매김하고 싶다면 적절한 분류 ‘학명’을 부여받아야 한다. 매우 명쾌한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한 줄 한 줄, 한 편 한 편, 음악 분야와 나 사이에 담이 쌓여 갔다. 본래부터 높았던 벽을 실감했다는 게 맞겠다. 나는 음악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귀로도, 머리로도 알지 못했고, 악기도 다룰 줄 몰랐고, 악보를 볼 줄도 몰랐다. 음악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귀에 들리는 대로 음악을 규정하고 평가해도 되는 것일까? 그래, 허구한 날 복싱 경기만 쳐다본다고 내가 날아오는 주먹을 가볍게 흘리고 사각으로 빠져 상대에게 일격을 가하게 될 리가 없잖아?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시, 소설 같은 신춘문예였다.


분야를 바꾼다고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소설도 시도 문학적 감성, 예술적인 면에는 전혀 다가갈 수가 없었다. 국문과에 돈을 냈으니 책이야 읽을 만큼 읽어 왔지만, 새로운 걸 써도 될 만큼 읽은 건 아니었다. 낙선, 낙방, 나의 아테네대학 원서처럼 제대로 접수는 되었는지, 우편 회로 어딘가에서 사라져 버렸는지. 그 시기를 지나며 겨우 인식하게 된 사실은 내가 어느 분류표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느 분류표의 책을 고르는지였다. 자서전, 평전, 종교, 1순위. 아이스크림, 커피, 맥주, 쌀은 어쩌다 먹게 되었는가 같은 생활사들이 2순위.



글 쓰는 일로 돈을 벌기는 어렵겠다는 자각이 들 때쯤, 두 번째 면접을 개판 치고 나왔던 곳에서 50만 원 비정규직으로 일하겠냐고 연락이 왔다. 이것만큼은, 하는 자존심이 없었으므로 덥석 받아들고, 주 3회 출근이라는 계약을 어기고 일주일 내내 나가 일했다. 한 주에 한두 권 책 리뷰를 쓰고, 문고본 책을 만들고, 그때그때 편집장이 쓰라는 기사를 쓰고, 전시회, 공연, 회의 심부름을 했다. 문고본을 11권을 기획하고 만들며 좋은 책은 편집자가 아니라 좋은 저자가 만든다는 걸 알았다. 서평은 보도 자료를 편집하면 됐기에 굳이 책을 다 읽을 필요도 없었다.


만약 내가 몸 담았던 문화단체의 각종 횡령과 배임 사건이 불거지지 않았다면 지금 이 나이까지 셀럽 에세이 리뷰나 쓰며 살았을지 모른다. 감사원 조사관이 확신을 갖고 지목한 범인이 있었고, 나는 참고인으로 감사원과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관련 직원들이 불려가 면담을 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감사원 조사관이 자기 동네 횟집으로 데려갔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성북 최순우 옛집 건너편, 선잠단지 근처 횟집이었다. 그 조사관이 나를 동네 후배쯤으로 여겼는지 이런저런 인연을 엮으면서 소주를 따라 주는데, 이분이 나를 잘 파악했던 거다. 밀린 월급이 6개월이 넘었던 내가 두려워했던 건 생활비지 감사원이 아니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소주 대신 맥주를 시켰고, 광어 말고 다른 거 뭐 없나 메뉴판을 살폈다. 


“근데, 여기가 어디쯤인가요? 가까운 지하철역이 어디지요?”


“동생, 걱정 하지 마. 내가 여기까지 오게 했는데 택시비도 안 줘서 보내겠어?”


이분이 나를 정말로 잘 파악한 거다. 나는 술 마시고 알아서 택시를 불러주는 사람의 인격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자, 한 잔 하고 아는 거 말해 봐.”


“어디까지 아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 심증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는 것은 다 말했다. 그가 ‘이건 틀림없다’고 말하면 그랬군요, 괜한 의심이 아니었네요, 혼자만의 속앓이를 토로하듯 맞장구를 쳤다.


“자, 그럼 그만 일어날까? 고맙네, 동생. 이제 자네는 검찰 조사를 받게 될 거야. 검찰은 나 같지는 않을 거야. 내가 마음이 안 좋구먼.”


뭐, 됐다. 택시비도 받았는데. 그리고 한 달 뒤 검찰청에 불려갔다. 검찰청 사람들도 회에 소주만 없었다 뿐이지 퍽이나 진지하고 애틋한 대화를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런 대화는 아주 간간이, 짧게 이어지고, 대부분의 시간은, 그러니까 5시간 정도는 조사관의 모니터 뒷면을 바라보며 가만 앉아 있었다. 한 가지 빠진 건 진술이 아니라 직업란이었다. 당시 직업이 없어 직업란을 비워두었더니 검사가 정말 직업이 없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럼 요즘 뭘 하고 지내세요?”


“어떤 출판사에 여행 원고를 보냈는데, 그게 출간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럼 작가시네요.”


“아니요. 이게 정말 책으로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책이 나왔냐, 안 나왔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쓰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요. 글을 쓰고 있으면 작가 아닌가요?”


비어 있던 공란에 ‘작가’라는 글자가 채워졌다. 그리하여 나는 검찰청 등단 1호 작가가 된 것이다. 1년 뒤 책도 나오긴 했다. 가이드북 네 번만 정독하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책이라 좋은 책이라는 얘기는 집에서도 못 들었다. 이후 여행 책을 네 권인가 더 썼지만, 다 잘 되지 않았다. 올해 초에는 여행과 딱히 상관없는 책을 썼는데, 그러다 보니 나란 인간이 뭐하는 사람인지, 과연 직업란에 무슨 글자를 채워야 하는지 다시 헷갈리기도 했다. 지금껏 무엇을 추구하고 산 건가. 그야말로 무특기자로서 목적 없이 살아 왔고, 이뤄 놓은 공이 없고, 당연히 세상 어떤 분류표에도 분포되지 못했다. 직업 없이, 그냥 내 삶이 직업인 채 살아왔다. 고양이 두 마리가 의도치 않게 내 삶에 들어와 있긴 하지만, 알아서 놀고, 주로 나를 거들떠도 안 보며, 나에게 기대지 않고 숙면에 들었다가, 나의 숙면에 개의치 않고 머리맡을 넘어 다닌다. 



속인찰찰 아독민민, 세상 사람들 모두 자신의 삶과 생활을 살피고 총명하고 어른스럽게 살아간다. 거기에 비해 나는 유독 가진 것 없이 무능하고 답답하게 살아간다. 숱한 <도덕경>이 해석하듯, 이 구절은 도를 구하는 사람들의 고독한 상황을 묘사한다. 다들 잇속에 밝고 꽃놀이에 나가 고기나 뜯으며 즐거워하는데, 나는 이다지도 외롭게 궁색한 방안에 앉아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건가. 아, 그건 아마도 나만 유독 도를 구하기 때문이지. 


꽃놀이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아오며 알 게 된 건, 봄놀이에 즐거워하는 사람들 역시 각자의 도드라진 외로움을 견디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고독은 도를 숭상하는 인간들만의 위대한 내면이 아니더라는 거다. 적적한 사람들이 스쳐가는 모습도 멀리서 보면 떠들썩해 보인다. 다들 자신들의 즐거움과 고독을 엎치락뒤치락하며 살아가고 있다. 두 번째 책이 예상된 실패의 여정을 밟고 있을 때였다. 3분의2 지하방 눅눅한 침대에서 11시 너머까지 이불에 말려 있던 나의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엄마가 내가 깨길 기다리고 있었다. 


“너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마. 사람 사는 모습 다 똑같아. 다 그만그만한 직업 찾아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면서 늙는 거야. 너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네 마음만 힘들어져” 


내 실망, 내 고독은 내 무능이 아니라 내 기대에서 자라났고, 나는 오랫동안 그 기대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그게 내 생의 의지였다. 나는 노자가 인간을 도에 가까운 사람과 도와 멀리 떨어진 속인으로 이분화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화기광, 동기진. 그게 노자가 일러 준 도의 자리였다. <도덕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삶이 아니라 철학으로 자신을 증명해 왔을 뿐이므로 스스로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리에 분류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만 외롭고 바보 같다는 감정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상대에게 원하는 대답은 "그러니까 당신은 특별하다"는 헌사였지 싶다. 


나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사람들과 응시하며 살아왔고, 외로운 바보들과 지하철에 실려 여기까지 살아왔다. 뚜렷한 목적과 의지를 내 보인 적도 없고, 권력을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어쩌다 보니 광어 대신 참치를 먹는 횟수가 늘었고, 한 해 한 해 소고기 등급을 높여 왔지만, 그게 잇속에 밝아서는 아니다. 세상 고독을 홀로 짊어지고 갈 생각이 없다 보니 여기 저기 맥주 테이블을 벌여 놓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어느 분류표에 내가 들어가 있는지 알게 된 건 아니다. 누군가 나를 어느 분류표에 놓아두었다면, 그건 그의 착오와 내가 행한 더 많은 착오가 빚어낸 착시현상일지 모른다.





글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

인스타그램 : @ree_joo_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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