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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Sep 10. 2020

어미 새가 음치일 때 삶의 양상

누군가에 의해서 우리는 부분만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


<도덕경> 12장 오색영인목맹 五色令人目盲
: 다양한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감각적이고 외면적인 가치, 화려하고 다양한 시각적 가치들이 내면의 세계를 볼 수 없게 한다.


내 육체에 확정된 병명을 연대순으로 나열하면, 녹색색맹, 비염, 비만 순이다. 간은 기적적으로 잘 버티고 있고, 시력은 그런대로 1점대를 상회하고 있다. 비만은 아주 오랜 기간을 두고 차근차근 얻게 된 것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손을 못 쓰고 있고, 도심에 살고 있으니만큼 비염은 정말 심각하다. 여기까지는 다 납득이 된다. 하지만 녹색색맹이란 게 내 몸에 실재하는 병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교사가 색약 검사표의 그림을 재빨리 따라 가지 못한다고 제멋대로 기록해 놓은 심술이 분명했다. 이후 11번의 학교 신체검사, 한 번의 군대 신체검사를 거치는 동안 한 번도 ‘녹색’이 내 시야를 막아선 적이 없었다. 산에서 풀색 군복을 입은 동료들과 때맞춰 근무교대만 잘 해 왔는데, 그 교사 정말 어디서 그런 단어는 주워들었던 걸까.


녹색색맹 진단 후 30년의 세월이 흘러, 불현듯 학생 기록부에 적혀 있던 그 병명이 현실로 다가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새 집의 인테리어에 맞게 청록색 소파를 주문했는데, 배달되어 온 소파를 보고 같이 사는 사람이 이게 청록색이 맞느냐 추궁을 해 온 것이다. 모니터 화면에서 빚어지기 마련인 색채 왜곡으로 정도의 차이야 있을 수 있지만, 이 소파는 분명 내가 의도한 ‘바로 그 색’과 같은 계열에 있다. 이건 청록색 소파다, 양보 없이 3년을 버텼다. 그리고 다시 이사를 하며 청록색 소파를 어느 헤비한 록커의 작업실에 기증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감사 인사를 받게 되었다.     


“파란 소파가 저희 작업실과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파란색이라고? 나의 청록색 소파에서 수없이 많은 맥주 캔을 구겼던 친구들에게 소파의 정확한 색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다. 우리 집 소파 기억나? 사진 찍은 거 있지? 너는 그게 무슨 색 같냐? 그 결과 완전무결한 파란색으로 밝혀졌다. 덤으로 사람들이 나에게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도 뒤늦게 전해 들었다. 


“너, 색 구분 못하잖아.” 


아뿔사. 녹색, 청색을 구분 못하는 건 아니다. 길도 잘 건너고, 녹차, 홍차, 우유 잘만 구분해 마신다. 다만, 그것들이 섞여 있을 때 나의 뇌는 그것들을 구분해서 보지 않고 대략적인 평균을 내어 한 단어로 이미지화해 왔던 것이다. 녹색 혹은 파란색으로. 많은 색은 나의 눈을 멀게 한다. 누군가 의도에 속아 넘어가서가 아니라 나의 뇌가 그 시각 정보들을 단순화하거나 왜곡해서 마치 바깥에서 막 입수한 정보처럼 보게 하는 음모를 꾸민다. 한 가지 색에 관련한 매우 사소한 장애이기에 나는 약간의 ‘이상 증세가 유지되는’ 선에서 정상적으로 살고 있다.  



오색, 갖가지 색에 노출되면 인간의 눈이 흐려진다. 색, 맛도 마찬가지고, 정보, 지식, 의견도 그렇다. 남발되는 정보 앞에서 인간은 판단력을 잃는다. 그래서 노출을 최소화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러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세상을 견디는 힘은 단위 시간당 얼마나 많은 정보를 처리했는가로 측정된다. 더 많은 노출이 필요하고, 그런 만큼 그 정보의 진위를 파악하고 거르고 목록화하는 능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젠더, 인종, 종교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이다. 내가 초중고를 나온 도시는 미군부대 주둔지였기에 어려서부터 백인, 히스패닉, 흑인과 뒤섞여 살았다. 90년대 후반이 되면서 도시 외곽 공장 지대에 동남아, 아프리카 노동자들이 들어왔고, 무슬림도 적지 않았다. 어린 나이부터 인종적, 종교적 거부감 없이 그들과 한 장소에서 먹고 마셨다. 인종의 벽은 도리어 유럽 여행을 다니며 나에게 닿는 외부시선에서 처음 느꼈다.


나를 가장 오래 괴롭힌 편견은 성소수자에 관한 정보 처리였다. 생각만으로 거부의 몸짓, 메스꺼움이 생겨났다. 그 증상이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한 건 좋아하는 작가로 조르주 페렉의 이름을 댔다가 원래 받기로 한 월급의 3분의 1만 받고 들어가게 된 그 회사에서였다. 


회사 가까이 있는 낙원상가에서 퀴어영화제가 열렸다. 영화 담당도 아니면서 자원해서 취재를 갔다. 영화제 부스에서 나눠주는 티셔츠로 갈아입고, 언론 명찰을 달고 영화제 시작을 기다리는데, 뭔가가 감지되기는 했으나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무얼까, 이 외로움, 나 혼자 동떨어진 듯한, 이방인이 된 듯한 감각.     


개막작을 보고, GV를 보고, 퀴어영화제의 퀴어가 영화적 실험에서 나오는 이상함이 아니라 성소수자를 다룬 영화를 뜻하는 것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그래도 이런저런 영화를, 사실은, 매우 힘들게 보았고, 참고할 만한 책을 읽었고, 기사를 썼다. 문래동에서 아주 잠시 동네 잡지를 만들 때는 퀴어영화 <종로의 기적> 상영회를 열고, ‘사람들은 제가 뚱뚱하다고 게이가 아닌 줄 알아요.’ 하고 자신을 소개한 감독과 GV도 진행했다. 상영회 뒤풀이에서는 실로 많은 관련자들을 만났다. 나의 거부감은 전적으로 노출의 문제였다. 게이든 드래그 퀸이든 아는 사람 하나 있으면 그 모든 거부감이 해소된다. 다만 그중에서도 나쁜 놈이 있고, 착취자도 있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또 오래 걸렸다. 소수자들은 착하다, 피해자다, 진보적이다, 다른 소수자와 연대한다, 이런 생각을 수정하는 게 영 찜찜했던 것이다. 사기성 농후한 게이에게 노출되며 아주 천천히, 다 인간이지 남들의 이해를 구해야 하는 인간 부류가 따로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정보가 많다는 것도, 거기에 하염없이 노출된다는 것도 인간이 처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를 어지럽게 한 문제는 전부 분류와 해석에서 발생했다.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나온 <도덕경>은 오색五色의 의미를 내가 기존에 읽었던 책들과는 달리 해석한다.


“노자는 무수히 많은 자연의 색깔과 소리와 맛이 있음에도 이를 다섯 가지로 한정하여 그것만을 인정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판한다.”


오색이 ‘다양한’이 아닌 오로지 ‘다섯 가지’라는 뜻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더 많은 게 있는데 왜 다섯 개만 보느냐, 왜 삶을 좁은 영역에 한정시키는가, 넓은 시야, 마음을 가져라. 나쁜 말은 아니다. 오색五色, 오미五味, 오음五音이 드넓은 세상에서 ‘오지선다’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을 비판하는 소리라고 하면, 그래 나를 되도록 다양한 상황에 노출시켜야 해, 하며 살아왔던 시간들이 다 도에 근접해 가는 과정이었군, 자부심을 느낄 만도 하다.


오五가 ‘여럿’의 관용적 표현으로 쓰인 건 진나라 이후, 약 2200년 전부터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오五가 오로지 '5'인 해석으로 <도덕경>을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그가 겪는 곤란은 내가 겪는 곤란의 정확의 반대 지점에 있게 된다. 그는 5에서 다(多)로 나는 다(多)에서 5로 서로의 생각을 좁혀 가야 한다. 그리고 이 정도의 대립 지점에 놓인 사람들이라면 좁히기보다는 마주치길 꺼리며 살아간다.


어떤 시각, 해석, 관점, 세계관이 주어지면 그 이외의 것을 보기 위해 실로 많은 감정적인 역경을 겪어야 한다. ‘대구’라는 지역적 요소와 ‘광주’라는 지역적 요소가 역사 해석과 정치적 판단에서 만나면 당당하게 서로를 몰아 부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당신이 어떤 해석의 자리에서 살고 있느냐다. 그러니까 나만의 생각이란 건 애당초 없다. 청약이라는 주거 복지 요소가 프리미엄이란 도박의 요소로 대놓고 대체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도,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집값이라는 환청을 어미 새의 목소리로 알고 자라왔기 때문이다. 나의 어미 새, 누구였을까?



나는 五를 ‘많은 수’의 대유법으로 읽고 있지만, ‘적은 수’, ‘한계’, ‘다섯’으로 해석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사실 둘 중에 무엇이 옳은지도 모르겠고, 금언으로 삼기엔 둘 다 좋은 말이니까. 내가 경계하는 것은 오로지 누구의 해석이 나에게 어미 새의 목소리로 들렸느냐 하는 것이다. 이 어미 새 단계는 대개 매우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온 중고등학교 교사들 대부분은 전두환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자들이었다. 권력의 정점으로 향하는 전두환의 광기를 남자라면 한 번쯤 가져야 할 로망이라 가르쳤던 탓에, 대학교 1학년 때 영화 <꽃잎>과 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비교하는 숙제에서 광주 시민들의 잔인성을 규탄하는 레포트를 제출하고 말았으니, 가짜 위정자, 우상화된 권력, 우상을 추대하고 숭상하여 교육하기까지 이른 현인들의 영향력은 얼마나 대단한가.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 숙제를 내 준 교수가 대구 출신에 이문열과 돈독한 사람이었다는 건 다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내가 아침마다 산책을 하는 인왕산 산책로에는 윤동주 하숙집 터와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내가 이 동네로 이사를 오겠다고 다짐한 데에는 윤동주 시인에 대한 흠모도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한글날 백일장 2등 상품으로 받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내가 스무 살까지 유일하게 갖고 있던 시집이었다. 대학을 가고 보니 시 담당 교수가 윤동주에 관한 책을 낸 사람이었다. 그건 다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윤동주 시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병원>과 <쉽게 씌어진 시>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험,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 윤동주, <병원> 일부     


젊은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오래 앓다 병원에 찾아 왔다. 그러나 ‘늙은’ 의사는 나에게 병이 없다고 한다. 나에겐 분명한 통증이 있지만, 늙은 의사는 병이 없다고 한다. 그는 젊은이의 아픔을 모를뿐더러, 심지어는 병이 없다며 아픔마저 빼앗아 버린다. 내가 의지할 곳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성 환자와의 공감뿐이다.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가?

-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일부     


늙은 교수의 강의는 나 홀로 침전해 가는 구체적인 행위이며, 이 행위에 몰두함으로써 나는 땀내, 사랑내 나는 고향과 가족, 동무들을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자문한다, 지금 나는 무얼 바라 이렇게 살고 있는가?     


그런데 이 부분을 나의 교수는 달리 해석했다. ‘늙은 교수’, ‘늙은 의사’는 땀내와 사랑내 나는 부모님의 대체자이며, 이들에게 다가감으로써 화자는 고향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땀내, 사랑내 나는 엄마 현금 카드로 학비를 계좌이체하고서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가며 생각했다. 대체 이 시의 ‘늙은’이란 단어 어디에 부모의 정이 있다는 걸까? 그는 본인이 늙은 교수로서 혹 늙은 닥터로서 ‘늙은’이란 시어에 기어코 따스한 해석을 수여하고 싶었던 걸까?



그 교수의 해석이 시를 받아들이는 ‘다채로울 오五’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해석이 삶의 배경이 되는 이들에겐, 특히나 그에게 학위를 받아야 하는 학생들에겐 분명 ‘한정의 오五’가 되었을 것이다. 시각을 준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지역적 세계관에 갇혀 모든 역사적 증거들을 몰역사적으로 갈아엎을 수 있는 폭력은 어미 새가 전달해 준 푸근한 시각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이 어미 새들, 전달자들 대부분이 자신의 영향력을 선하고 정의롭게 평가하고 있다는 게 내 마음을 매우 갑갑하게 한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만약, 그 ‘한정의 오五’가, ‘따뜻한 늙음’이 명백한 오류라면, 그래도 그것을 단지 해석의 차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게 문제라면, 책임은 누가에게 있을까? 저자? 교수? 보통 돈을 버는 건 그들이다. 대신,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믿음이 신성모독인 줄 모르는 신자들, 겨우 젖먹이 시절 한국전쟁을 겪었으면서 빨갱이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나는 겪어 봐서 안다는 노인들, 흑인은 운동을 잘하는 대신 머리가 나쁘다는 소름끼치게 유치한 대화를 주고받는 20대들, 그들이 인생을 걸고 오류에 뛰어든다. 내가 어떤 해석에 놓여 있는지, 그게 옳은지 나로선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세상의 어느 구석만 바라보고 사는 것인지 아니면 전체를 바라보며 사는 것인지, 판단을 못하겠다. 내 판단은 내가 녹색을 보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외부 정보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 재단한 정보를 외부에 투사해서 마치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보는 듯한 역류 현상을 만들어내는 까닭이다.


판단색맹, 내 투병 이력에 새로이 추가된 병명이다.





글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를 펴냈다.

인스타그램 : @ree_joo_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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