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evergreen
Aug 13. 2022
결혼할 때에
남편과 나는 양쪽집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않고
우리가 가진 돈으로
작은 전셋집을 구해 살림을 시작했다.
물이 잘 빠지지도 않던 화장실이 있는 집에서
큰 아이를 키우며
힘든줄 모르고 신혼생활을 즐기다
두번째 옮긴
안방에 곰팡이가 그득한 전세집에서는
둘째 아이를 키우며
내집마련의 꿈을 키웠다.
그렇게
결혼한 지 4년차에
작은 시골에 29평 신축 아파트를
은행대출 크게 끼고 구매를 했고
큰 집으로 이사하던 날
평생 상가 2층 좁은 집에 살며
넓은 아파트를 꿈꿔왔던 남편은
이게 꿈인가 하여 하염없이 새집을 쓸고 닦았다.
주변 지인들은
젊은 나이에 집도 장만하고
딸, 아들도 다 가졌다며 축하인사를 해왔고
그 인사덕에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는사람마냥
기쁨에 취해 살고 있던 어느 날,
일하러 타지에 내려가신 시아버지께서
연락이 되지 않는다.
더운 여름 날 현장에서 일하시는 아버님이
하루 꼬박 연락이 되지 않는다.
다음날 새벽 119에 전화를 걸어
아버님계신 주소를 알려드렸고
숨막히는 적막감과 불안감 속에
이미 결말을 알것같은 느낌속에
전화한통을 받고
여름의 그 꿉꿉한 온도의 불쾌감 속
온 가족은 주저앉아 절규를 했다.
다음주에 온 가족 여름 캠핑을 갈 거라고
거실에는 에어매트리스를 사다 펼쳐놨는데
그 위에서 시어머니는 몇번이나 까무러치셨다.
아장아장 걸어나오는 둘째와
눈비비며 잠에서 깬 첫째가
내품에 안긴다.
그렇게 돌도 지나지 않은 둘째를 등에 업고
장례식장 정수기 뜨거운물로 아이 젖병을 세척해가며
시아버지 장례를 마쳤다.
상대적으로 내가 그들보다는 슬픔이 덜 할것 같아
시어머니와 남편과 시누를 위로하고
네살 난 딸아이는 이 상황을 모르길 바랬지만
따내는 그 어린 마음도 느껴지는게 있었는지
그 무거운마음을 이기지 못해
온갖 틱이 왔다.
눈을 깜빡이고 코를 킁킁댄다.
그래도 내가 슬픔이 덜 할것같아
딸아이도 내가 품어 병원을 다니고 치료를 했다.
불행은 얼마나 함께 다니길 좋아하는지
한달도 채 지나지않아
어머니께서 암 판정을 받으셨고
남들이 치켜세워주던
그 작은 동네 최신식 새 아파트
새 집에서
날마다 함께 사이좋게 무너졌다.
하지만
죽음과
죽음의 문턱으로 가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은
신기하게도
어린 생명의 몸짓하나하나가 그 모든것을 덮어버린다.
항암중 머리가 다 빠지신 어머니께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는 둘째아이의 모습이
미소를 띄게 했고
첫째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배운
작은 율동에 온 가족의 마음에 행복이 움틀거리게 한다.
아니, 삶의 의지로 붙잡을 만한게
이 아이들 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족이 두 생명을 보며
조금씩 밥상에서 울지 않고 밥을 먹게 되었고
두통약을 먹으면서도 일부러 야외 유원지를 나가고
큰아이 어린이집 행사에 대가족 출동하며 일부러 더 웃고
조금씩 일상을 회복해 나갔다.
남편도 어느정도 마음이 안정 되었을 때에
조용히 내게 말을 건넨다.
"여보, 이사가자.
여기있으면 매일 그 날이 생각나.
아버지 돌아가셨던 그 날이.
미안한데 여기서 좋은 기억이 없어.
이사가자, 여보."
그렇게
남향은 비싸다고
조금 저렴한 남서쪽을 바라보던
해질녘 노을이 고왔던 새집을 팔아버렸다.
고속도로를 타고가다보면
길가에 그 아파트가 보인다.
나는 그 때의 그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데
나의 사랑하는 남편도 그렇겠지,
운전하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