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길 잘 한 아이”
(23년 좋은생각 공모전에 냈지만 광탈한 글이지만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울음으로 비워 냈던지, 그냥 두기 아까워 올려 봅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을 애타게 원하는 집에서 둘째 딸이라 지우려 했으나 발길질이 심해 낳았단다. 뻐꾸기가 서글피 울던 날 바람처럼 사라진 생모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떠나 버렸다. 원치않게 세상에 던져져 사랑을 받으려 무던히도 애썼다. 곁에있는 어른들의 예쁨을 받으려 그들의 눈치를 살폈고 사랑받지 못하면 내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거라 생각했다. 그 아이가 자라 결혼을 앞에 두고 예비 시어머니께서 궁합을 본다며 태어난 시간을 물으셔서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시간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 아침 즈음인지 오후 즈음인지 새까만 저녁즈음이었는지도 아무도 모른다. 정말 환영받지 못한 아이였나 보다.
속절없이 나이는 들어갔고 나는 그렇게 결핍된 채로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았다. 완벽한 어른의 모습을 꿈꾸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읽었고 내 아이들에게는 나와 같은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 육아 서적도 닥치는대로 읽어가며 이상적인 나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악바리 같이 살아냈다. 그러던 내 나이 서른 여섯. 어김없이 자신을 채찍질 하며 일상을 보내는데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고 팔다리에 힘이 빠진다. 병원을 돌고 돌아 도착한 정신과에서 ‘우울증, 불안장애’ 판정과 ‘자기방어 수치가 높다’며 약처방을 받았다. 터질 것이 잘 터진 것 같았다. 애써 밝은 척하며 살아냈지만 오롯이 혼자 직면한 시간에는 한없이 깊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던 시간들이었다. 이제 좀 어떻게든 치유가 되려나, 희망을 다시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6개월 동안 약을 먹어도 깊은 심연의 우울을 거둘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과 여행 중 들른 낯선 서점에서 한 권의 책을 사게 됐고 그 책의 구절 하나에 나는 어린 아이처럼 소리 내 엉엉 울어버렸다.
“나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가 문제다.”
나는 여태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완벽하게 아내와 엄마, 강사로써 일을 해내지 못할 때면 내 존재 자체가 문제라 생각하고 궁지로 몰았었다. 그런데 작가는 따스히 말을 건넨다. “나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야..” 라고.
낯선 세상에 덩그러니 던져진 아기가 내 눈앞에 떠오른다. 사랑을 받기 위해 눈치를 보며 한껏 작아진 모습을 한 아기가 웅크린 채로 벌벌 떨고 있다.
“아가야, 나의 아가야. 미안하다. 내가 정말 미안해. 이제 내가 너의 곁에서 원없이 사랑을 주는 너의 엄마도 되고 아빠도 될게. 넘치는 사랑만 줄게. 이젠 나와 함께 따스히 살아내자.”
두 손을 내 가슴에 포개어 얹고 중얼 거렸다.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 내렸다. 온전히 한번도 제대로 따스한 눈빛을 받아 본 적 없었을 작은 아기의 울음까지 포개어져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난생 처음으로 내가 나를 온전히,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안아주던 순간이었다.
서른 여덞, 내 두 아이를 청소년기까지 오롯이 잘 키워낸 나이에 다시 내 안의 작고 연약한 아기를 보듬으며 살아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지금 내 안에는 태어나길 잘 한 아이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