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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기러기 생활을 시작하다

가족을 위한 선택, 그리고 7년의 여정

by 김종섭
⑧이 시대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2007년, 나는 43세의 나이에 인생의 큰 결정을 내렸다. 아내와 함께 두 아들을 캐나다로 유학 보내기로 했다. 유학이라는 목적 안에는 사실 이민도 고려하고 있었다. 큰아들은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기였고, 작은아들은 초등학교 2학년으로 진학할 시기였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한국의 교육 환경을 고민도 있었지만, 아내와 나는 가족 전체의 장기적인 삶을 고려해 선택을 내렸다. 나는 한국에 남아 직장 생활을 이어가기로 했고, 그렇게 나의 7년간의 기러기 생활이 시작되었다.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은 그대로 유지했지만, 생활의 무게는 완전히 달라졌다. 집안의 짐은 대부분 캐나다로 보냈고, 혼자 생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건만 남겼다. 식구들이 쓰던 물건이 사라진 집은 낯설었지만, 가족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아 오히려 혼자 보내는 환경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외롭기보다 가족이 새로운 환경에서 잘 적응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직장 생활은 여전히 바빴고,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는 횟수를 줄이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당시에는 카카오톡이나 영상통화 같은 기술이 없었기에 국제전화와 이메일이 가족과의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다. 영상통화가 있었다면 지금보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덜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적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생활이 자유롭게 느껴지던 시기도 가끔씩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에 공허함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아쉬웠다. 큰아들은 고등학교에 적응해야 했고, 작은아들은 어린 나이에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한창 아빠에게 응석을 부리고 사랑을 받아야 할 시기에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아내도 낯선 나라에서 두 아이를 챙기며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남아 경제적인 책임을 지는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내가 가장 역할이상의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점점 기러기 생활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과 다시 함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한국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아빠가 필요했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필요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 고작 남은 인생 얼마나 된다고 가족과 떨어져 가며 그렇게까지 힘들게 살아야 하느냐”는 이야기가 자주 들려오는 단골 메뉴가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남에 일에 신경 쓴다고 언짢은 마음으로 무심히 넘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말들이 진심 어린 충고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3년 새해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오랜 숙고 끝에 9월쯤에 완전한 결심을 내렸고, 한국에서의 삶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그리고 2014년 1월, 50세의 나이에 마침내 가족이 있는 캐나다로 향했다. 7년 동안 혼자 살아오면서 느꼈던 감정과 깨달음이 캐나다로 떠나는 결정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기러기 생활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과 함께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도전에 나섰다. 캐나다에서의 삶, 그리고 정착 과정은 또 다른 이야기다. 어쩌면 이것은 인생의 2막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었지만, 가족과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용기가 되었다. 이제 캐나다에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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