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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도 Jun 03. 2020

NO미디어 육아 이래도 하시겠습니까?

TV없이 코로나19를 견디는 5세 스케줄

내 아이에게 영상 미디어 노출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네 살부터 영어 DVD만 허용했고, 다섯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집의 TV는 꺼져 있었다.


할머니들께서 아이를 봐주러 오셨을 땐 아마도 TV를 켜셨을 것 같다. 하지만 나와 남편이 있을 땐 아이 앞에서 절대 TV를 틀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각각 자신의 핸드폰으로만 TV를 시청했고 (드라마 속 잘 생긴 남주들을 큰 화면으로 못 보는 내 눈에게 미안해) 루테인을 아주 열심히 챙겨 먹었다. 이렇게 5년째 살아왔다.  


코로나19로 어린이집 등원이 무기한 연기되고 나 역시 출근을 하지 않게 되면서 이 시스템은 굉장한 난관에 봉착했다. 다섯 살 외동아들과 하루 종일 함께 놀아주다보니 나만의 시간 확보가 너무 어려운거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들의 연속이었다.


도대체 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자투리시간들이 있을 거야, 시간이 없다고 푸념만   아니라 직접  24시간을 분석해보자. 사각지대에서 버려지고 있을 시간의 조각들을 찾아 나만의 시간으로 가치 있게 써보자!’


이런 원대한 계획아래, 어느 날 나의 하루를 수기로 적어보았다.

규칙은 단 하나. 최대한 꼼꼼하고 자세히 기록할 것. 식탁위에 A4지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를 올려두고 매 시간마다 한 일을 상세히 기록했다.


다음은 그날의 기록이다.



오전7시 :

아이 기상. 아이 방에 가서 아이 껴안고 팔베개 해주고 딩굴딩굴하기. 그림 그려달라고 해서 거실로 나감. BGM으로 클래식 라디오 켬. 기상 직후 나의 심신의 안정을 위해 라디오로 클래식 듣기 시작한지 3일 째.


7시~8시 :

클래식 라디오 83.1에서 나오는 연주곡 2곡을 들으며 <배꼽괴물>과 <큰입장어>를 그려줌. 아이가 색칠을 하다가 갑자기 라디오를 막 두들기고 만져서 주파수가 맞춰지지 않음. 아무래도 망가진 것 같음. 급 짜증났으나 참음. <배꼽괴물>그림의 배꼽엔 단추를 붙여주고, <큰입장어> 그림엔 눈알을 붙여줌.


배꼽괴물과 큰입장어


8시~9시 :

한글책 <배꼽괴물>과 <고릴라>를 읽어줌. 책 읽고 나서 하드스틱으로 한글 만들기 놀이 해봄. (한글쓰기는 싫어해서 빨대, 하드스틱등으로 한글 만들기 놀이하는 요즈음)


9시~10시 :

튼튼영어주니어 DVD 보며 우유+시리얼 먹음. 비트박스 장면이 나오자 아이가 엄마랑 같이 춤추고 싶다 함. 옷장에서 스냅백이랑 비니 꺼내 쓰고 함께 비트박스 춤 춰봄. 다리가 풀림.


10시~10시30분 :

영어책 <Vagetable Jungle> 읽어주고 책 내용 그대로 역할놀이 2번 반복해서 놀기. 갑자기 책에 나오는 브로콜리가 먹고 싶다고 해서 지금은 없다고 했더니 아이가 짜증냄.


10시30분~11시15분 :

브로콜리 대신 사과 찾아 깎아줌. 사과 먹으며 한글책 <바닷 속 물고기> <탐험대장 송사리> 읽어줌. 책 속에 나온 동물들 그림 그려달라고 해서 장구애비, 송사리, 이구아나 그려줌. (엄마가 그림 그려주는 건 지금이 마지막이고 그 다음부터는 본인이 그리겠다고 약속. 이 그림만 그려주면 엄마에겐 엄마만의 공부 시간울 주겠다고 함. 희망이 생김.)


11시15분~11시30분 :

엄마랑 잠시 함께 누워 껴안고 있고 싶다고 해서 팔베개 해주고 누워 딩굴 거렸음. “엄마는 역시 포근하다~”라는 얘기를 들음.


11시30분~12시20분 :

드디어 오늘 처음 얻은 개인시간! 그러나 너무 배가 고픔. 아이도 배고프다고 함. 일단 점심을 먹고 뭐든 하기로 함. 냉동실에 있던 보리굴비 1마리를 반찬으로 함께 맛나게 먹음. 밥 먹는 동안 한글이야호 DVD <고기>, <누나> 2편을 함께 보았음.


12시20분~1시 :

밥먹고 나니 또 공룡 그림 그려 달라 함. 엄마의 그림은 마지막이라던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딱 하나만 더!”라는 생떼 부리기 시작. 결국 스피노사우르스를 엄청 크게 그려줌. 아이가 색을 잘 칠해서 “너~무 잘 칠했다, 역시 컬러감각이 좋아!” 라고 칭찬해 줬더니 또 삘 받았는지 티라노사우르스까지 그려 달라 함. 결국 티라노도 그려줌. 티라노사우르스도 색칠을 잘 해서 칭찬해줌. (다행히 더 그려달라고는 안함.) 냉동실에서 꺼내놓았던 무화과를 간식으로 줬더니 엄청 맛있어함. “무화과가 몸에 좋은거야~” 라고 알려줬더니 그럼 자기는 이거 먹고 코로나바이러스를 무찌를 거라 함. 기운이 없어서 더 이상 긴 애기 못해줌.


1시~2시 :

드디어 나의 자유 시간! 나는 원래 침대에 누워 있고 싶었는데 침대는 절대 안 된다고 함. 자기 눈에 보이는 식탁에서 엄마 공부하라고 함. 결국 식탁에서 영문법 책 꺼내 봄. 그동안 아이는 혼자서 공룡 그림을 5개 그림. 중간 중간 계속 오려달라고 주문해서 공부의 흐름이 엄청 끊김. 영문법 2챕터 겨우 봄.  


2시~3시 :

빵 먹고 싶다고 해서 빵 사러 나감. 정작 빵엔 관심 없고 편의점에서 장난감 2개 사달라고 떼써서 결국 사줌.


3시~4시 :

사가지고 온 장난감으로 함께 역할놀이 함. 당연히 내가 나쁜 놈. 연속 세 번 죽음. 세 번 다 다르게 죽느라 힘들었음.


4시~4시30분:

내셔널 지오그래픽키즈 한글책 <뱀>, <거미> 읽어줌.





아이 잠들때까지 끝까지 쓰고 싶었으나 지쳐 포기했다. 한 시간 마다 무언가를 적고 있는 엄마 때문에 아이가 점점 짜증을 내기도 했고, 역시나 저녁이후에도 낮과 다름없는 비슷한 패턴의 시간이 흘러갔다.


밤에 재 재워놓고 오늘의 일과를 주욱 훑어보는데 두 가지를 발견했다.

첫째, 다섯 살 내 아이는 책과 그림을 참 좋아하는구나.

둘째, 나만의 시간은 정말 없구나.


데이터 분석은 끝났다.


다음날 나는 아이에게 TV 허했다.


헬로카봇 애니메이션에 빠져서 이제 나를 전만큼 많이 찾지 않는 아이를 보며 과연 내가 잘 한 일일까 마음이 어지러울 때 그날의 A4용지를 꺼내본다. 그리고 나를 위로하며 다짐한다.

 ‘이렇게 생겨난 나만의 시간들이니까 허투루 쓰지 말고 더 소중히 사용하면 되는거야~’ 라고.  

오늘 나는 그렇게 얻은 시간에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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