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발 보다 2.5배는 더 큰 뾰족구두를 신고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딛는 중이다. 그리고 어렵게 겨우 뗀 한 발에 가슴이 벅차서 가끔 두 팔은 귀에 바짝 붙여서 머리끝까지 들어 올리고 두 발은 가지런히 모아 만세를 부른다. 차림은 위아래 단벌로 맞춰진 속옷이다. 러닝에 삼각팬티만을 입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그녀의 나이가 5세 때이다.
집안에서 "두 번째 또 딸이야"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어느 날 그것도 잠시 잊은 채 밖에서 땀을 흘려가며 놀던 아이가 목이 말라 엄마를 급히 찾으며 집에 잠시 들렀다. 아이를 기다리던 집은 도착하기도 전에 멀리서도 들리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아이의 움직임을 더 적극적으로 하게 했다. 손님들이 많이 있다는 건 집 앞에 놓인 '신들'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는 다시 한번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신들을 천천히 살핀다. 아이의 외가 친척들이었다. 대화중에 시선이 마주친 이모께서 한쪽 눈을 살짝 찡긋하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비록 팬티 차림이었지만 귀엽고 상냥하게 인사를 끝낸 후 다시 외출을 하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의 눈에 띈 빨간 뾰족구두가 여러 켤레의 '신' 가운데서 자태를 뽐내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다섯 살이라는 현재 자신의 나이와 자리에서 여러 갈등 후에 아이는 마음의 결정을 끝낸 거처럼 갑자기 조그만 손으로 뾰족구두를 가지고 밖으로 나간다. 집 앞에서 자신이 신고 있던 신을 벗고 빨간 뾰족구두로 갈아 신은 후 깊은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위태롭게 한 발 한 발 천천히 떼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걸음으로는 불과 얼마 안 되는 거리가 아이에게는 꽤나 멀게 느껴졌다. 들뜬 마음으로 한참을 고생한 후 뒤돌아보니 집이 꽤 멀리 보였다.
조금 더 숨을 죽이며 천천히 한 발씩 떼고 있는데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와 이모였는데 이모가 곧 가셔야 한다고 신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신의 주인은 역시 이모였다. 마음만 급했지 이번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빠르게 뛰어오셔서 그녀를 안아 올렸다. 몸이 약해서 다섯 살 또래보다 훨씬 가벼운 그녀를 엄마는 자주 안아주곤 하셨다. 그녀가 엄마 아빠의 등에 집착하며 사랑을 갈구했던 그때부터. 야단을 하면서도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고 가끔씩 뽀뽀도 하는 게 아닌가. 그럴 때마다 아이는 엄마에게 야단을 맞는 건지 고백을 받은 건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곤혹스러워했다.
이모에게 빨간 뾰족구두를 가져가서 내려놓으며 엄마께서 말씀하신다. "구두가 얼마나 맘에 들었으면 아직 눈도 못 떼고 혼이 다 빠진 거 같네." 하며 소리 내어 웃으신다. 이모 역시도 "우리 귀염둥이가 구두가 그렇게도 탐이 났어요?" 하시며 아이의 볼을 꼬집는 시늉을 하신다.
어른들이 하시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시각적으로 아이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 뾰족구두 한 켤레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빨갛게 물들어 있는 구두는 그녀가 많이도 좋아하는 산딸기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아마도 곧 울음을 터트려야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듯 아이는 입술을 움직이며 준비자세를 취한다. 여전히 시선은 구두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하나 둘 셋... 맘의 준비를 끝낸 아이가 이제 곧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깨닫는다. 울고 보채도 내 것이 아닌 것은 결국 나의 곁에서 머무를 수도 내 것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자신의 발에서 끝내 벗겨지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던 빨간 뾰족구두를 아이 스스로 벗어던졌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이나 주변인들에게 둘째 딸임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드려야 했다. 이후에도 구두를 벗어던진 아쉬움으로 아이는 괴로워했다. 빨간 뾰족구두는 꿈속에서도 등장했고 지나가며 빛깔이 비슷한 물건에는 모두 시선이 갔다.그아쉬움과 미련은 한동안 아이를 괴롭혔다.
한참 동안 아이를 괴롭혀 왔던 빨간 뾰족구두는 엄마가 전달한 선물로 완전히 잊혔다. 이번에는 자신의 발의 두배가 넘는 큰 신도 아니며 뒷굽이 아주 높은 뾰족구두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한 발 한 발 떼지 않아도 된다. 아이에게 딱 맞는 빨간 구두였다. 그날 눈을 뗄 수 없었던 빨간 뾰족구두를 순순히 벗어던진 아이의 모습이 안쓰러워 이모께서 준비한 선물이었다.
아이는 이모의 사랑 또한 계획하고 짐작했던 걸까? 빨간 뾰족구두를 던진 후 다시 그것을 채워 줄 아이의 몸에 딱 맞는 그런 사랑이 선물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던 걸까? 어쨌든 다섯 살 아이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삶을 살아가며 얼마만큼 중요한지도 깨닫는다. 비우기와 채우기의 순서를, 덜어내기와 다시 보태기를.
아이가 부모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다양했다. 몸이 약했으며 자주 아팠다. 또 소리 내어 종알종알 말했으며 수시로 울어댔다. 엄마는 어떤 모습의 그녀에게도 놀라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내면 깊은 곳에 깔려있는 안쓰러움과 사랑의 감정이 공존했다. 그 순간 아이를 향한 눈빛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듯했다.아이가 지우려고 애썼던 조부모의 '혼의 소리'를 엄마 또한 기억하고 그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어 왔는지 짐작하셨을 거다. 그래서 아이를 향한 사랑을 충분히 주시려는 거다.
이이에게 부모님은 빛을 찾을 수 있게 길을 열어주셨다. 빛을 주셨다. 마치 수학에서 찾아낸 가장 아름다운 수식을 마주한 것만큼이나. 어둠에서 길을 찾고 나아갈 수 있는 빛, 그 빛은 유성이리라.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문학작품과도 같았다. 오일러의 항등식은 그녀가 세상을 바라볼 때 수식과의 대응에서 아름다움에 감명을 받았던 항등식이다. 공식을 항등식으로 유도하는 과정에서도 벅찬 희열을 느꼈다. 아이에게는 수식에 등장하는 상수나 기호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를 넘어선 의식 깊은 곳까지 확장된 수의 범위이다. 덧셈에 대한 항등원 '0' 곱셈에 대한 항등원 '1' 무리수'π' 실수 범위를 넘어 복소수 범위에 존재하는 허수'i' 무리 상수'e'까지 모양에서도 대칭과 균형의 미가 적절하다. 오일러의 항등식이 전하는 수학의 말은 세계의 확장, 세대의 전환이 아닐까 한다. 아이의 부모님이 주신 사랑처럼. 조부모와 이어지던 끈은 아픔이었지만 단절할 수 있을 만큼 부모님의 사랑에서 아름다운 빛을 보았다. 세계가 확장되면서 수의 세계 역시 다채롭게 자연에 닿았다. 마침내 복소수의 세계까지 확장되는 수의 세상은 여러 감정과 의식이 아름다움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