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된 기억 사라진 시간
지난 몇 개월 시간을 쫓아가며 뚜렷한 기억이라고 믿고 있었던, 이미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어 본다.
망각된 기억과 사라진 시간들... 지금 내게 남겨진 건 날짜를 기억해 내는 숫자 정도로 짧은 기억뿐이다.
그저 순간의 기억뿐. 놀랍다. 작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적지 않는 사건, 사고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대부분 상처 이후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상의 소소한 기억이 가족으로 때론 주변인으로 강하게 남기도 했다. 아주 가끔은 큰 사건이 희미해지며 감정까지 스스로 정해둔 프레임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의적, 능동적 입장인지 타의적, 수동적 입장인지에 따라 정말로 큰 차이를 보였다.
현재 처한 상황은 스스로 경계를 넘어 나갈 수 없기에 프레임 바깥으로 보이는 봄을 만끽하고 있을 뿐이다. 봄, 봄이다! 프레임 바깥으로 보이는 세상에는 건물들로 가려져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만개한 벚꽃, 바람이 불자 흩날리는 꽃잎을, 던지고 간 향기의 여운을 겨우 쫓아간다. 설레는 감정을 느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내 감정을 만족스럽게 해 주지는 못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어느 계절의 기억이다. 정적이고 수동적 입장에 조금씩 길들여지고 있을 때 자신에겐 생활이자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 있었다. 겨울, 초겨울의 마른 낙엽 냄새와 그때 코 끝을 찌르는 향과 마르고 거친 촉감이 수시로 내 신경을 건드렸다. 마른풀과 건조한 대기에 대한 걱정으로 한숨이 늘었다. 하지만 내가 접한, 시각화된 세상은 현실과 닿지 않았다. 그저 창밖에 존재해 있을 뿐이었다.
수학 수업 중에 아이들이 생각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있는 것을 염려했었다. 고1 교육과정에 들어가 있는 명제 단원을 공부할 때였다. 사실, 명제 단원은 논리적 근거가 가장 필요한 단원이기도 하고 책 읽기나 삼단논법과 가장 많이 연계되어 있는 단원이다. 명제를 공부하며 학생들에게 명제에서 부정을 무심한 듯 던졌다. 부정은 not, 아니다(~)를 품고 있다. 진리 집합으로 표현하면 여집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명제 p -> q의 부정은 ~p -> ~q이다.(명제 p이면 q이다 의 부정은 p가 아니면 q가 아니다)
"얘들아. 여기서, 질문이 있어. 명제에서 '모든'의 부정은 뭘까? J가 가볍게 답한다. 존재하지 않아요. D가 '0' 아니에요? 음... 공집합이요." 반복해서 미소 짓는 나에게 답답하다는 듯 답을 말해줄 것을 요구한다. "모든의 부정은 어떤 이야." 다시 정리하면 '모든 실수 x에 대하여'의 부정은 '어떤 실수 x에 대하여'이다. D의 예사롭지 않은 질문이 있었다.
~some =all, ~all=some인데 ~all은 any라고 대부분 생각하고 우리의 삶에서도 그걸 적용하며 살아온 것이다. 망각된 기억은 삶의 대부분 기억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망각되고 사라진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삶 전체가 지워지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특정 어떤 기억이나 시간을 의미한다.
명제를 공부하며 아이들과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고 있는 오류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단, 일주일 간의 갇혀있는 나의 공간 프레임 안쪽의 세상에서 온도와 분위기, 기압 등 전혀 다른 세상을 바라볼 때의 나의 시각, 마음 읽기가 얼마나 유연하지 못한 지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변화 없는 그 계절에 대해 어느덧 익숙해졌다. 새로움을 포기하고 있을 때쯤 그토록 건조한 자연이 아사 직전에 끈질기게 기다렸던 단비로 스르르 해갈된다. 주변엔 어둠이 깔리고 시선을 붙잡은 하늘에선 팝콘 같은 벚꽃 잎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니, 벚꽃 잎이 흩날리는 것을 닮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오감이 조금씩 반응을 한다. 굳어있던 안면근육이 움직이며 얼굴빛은 부분 홍조로 혈색이 돌기 시작한다. 시각적으로 기계에서 팝콘이 튀겨져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듯 끝이 보이지 않는 어느 곳에서 함박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봄날 벚꽃이 만개했다 꽃잎이 거리에 흩날릴 때처럼 가볍고 천천히 많은 양을 흩뿌린다. 프레임에 갇혀 프레임 바깥세상의 함박눈을 감상했던 그때를 잠시 기억해 낸다. 마음을 울리는 여러 단어가 스치듯 지나간다.
흩날리는 벚꽃 잎, 지난겨울에 쏟아지던 함박눈, 팝콘 기계에서 팝콘이 튀겨져 나올 때의 그 움직임을 모두 쫓아가본 적이 있다. 이차 함수 모양으로 움직이는 포물선 운동... 갇힌 내가 있는 이곳, 나는 지금 프레임 경계에 서 있다. 같은 시각 다른 공간에서의 운동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프레임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포물선 운동을 바라보며 다른 세상의 포물선 운동을 구체적으로 그려본다.
아이는 종이 밖으로 선을 그었다. 마치 본인이 존재하는 지금이 전부가 아니라는 듯. 정답보다 정답이 아닌 세상을 찾는 것이 훨씬 편할지도 모른다. 그곳에 존재하는 또 다른 곡선이 있을 거라 믿는 마음. 그 믿음에서 포물선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지도.
세상은 늘 중심과 궤도를 정하고 우리를 그 위에 놓으려 하지만 아이는 포물선 위에서 바깥을 그리고 상상했다. 수학을 넘어서 삶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 그 안에 있었다.
지금은 봄, 봄 가운데서도 매화가 만개했던 시간을 지나 벚꽃이 거리 곳곳에 전리품처럼 우리의 눈을 경이롭고 즐겁게 한다. 딸아이가 하굣길에 벚꽃 만발한 거리를 거닐며 벅찬 감정을 느끼고 엄마와 그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며 인증 컷을 찍어 보낸다. 애정 가득한 마음으로. 어느 겨울 조금 더 소극적이었던 내 감정과는 달리 지금은 스스로 바라보는 프레임을 깨트리고 뛰쳐나가고 싶다. 그만 던져 버리고 싶은 걸까. 인증컷을 찍으며 활짝 미소 짓던 딸아이와 그곳에서 함께하고 싶다. 두 팔을 활짝 들어 올려 아름답게 흩날리는 벚꽃 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 두었다. 함박눈이 천천히 떨어져서 손바닥 위에 닿아 생명을 다해갈 때의 여운은 눈의 결정체만큼이나 아름답고 고귀하다.
사랑스러운 봄 볕이나 아이와 함께 하고픈 봄 안의 벚꽃 길을 만끽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의 입장, 프레임을 통한 바깥세상 바라보기는 단순히 자의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타의에 의해 수동적 입장과 위치에서 그저 창밖 세상을 하염없이 그리워한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며 오미크론 확진자가 되었다. 세상과 단절되어 자가격리의 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다.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며 2년을 넘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해 견뎌내고 이겨왔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코로나는 정점을 찍고 종식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며 생활 반경을 최소한으로 했고 억제된 패턴을 유지하며 생활해 왔다.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도 나와는 상관없고 먼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렇게 쉽게 만만히 확진자가 되기 전까지는.
몸이 아프고 맘도 함께 병들어간다. 무기력증일까. 일주일간의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기지 않음 그 시간 안의 내 기억은 다시 망각된다. 격리된 일주일간의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떠 올려야만 했다. 평범한 일상에서의 감정과 병상에 갇혀 지낸 시간 안에 녹아있는 감정 그리고 최고치로 달아오른 다른 내 감정까지 모두 기억해두고 싶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고 표현하는 감각이 사라질까 봐 두렵다. 망각된 지난 몇 개월을 전부 기억해 낼 수는 없어도 사라진 시간을 조금씩 찾으려고 한다. 묘하게 이차함수를 닮은 확진자 수 역시 최고치의 정점을 찍으며 확진자수는 다시 감소한다.
확진 이후 매일 규칙적으로 실천 한건 하루 두 번의 환기와 동시에 한 번의 집안 소독이었다. 집안에는 두 명의 확진자와 두 명의 정상인이 함께 동거를 하기 때문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나 아들의 안전에 대한 불감적인 태도가 답답해서 더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기침이나 오한 등 증상이 심한 편이라 약을 꾸준히 섭취하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규칙적으로 약을 섭취하기 전 식사까지... 환기를 하며 바깥공기를 맘껏 들이마시지만 벚꽃 가득한 그 거리를 걸으며 봄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다는 욕구는 끝이 없다. 마치 금지된 사랑처럼 지금은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현실보다 아름답게 꾸며진 프레임 바깥세상, 벚꽃 아래의 그 공기가 더욱 그립기만 하다.
프레임 안에 갇혀서 포물선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깥세상을 맘껏 사랑하며 달콤한 향기로 퍼져있는 봄기운을 만끽한다. 하지만 그 세상에 만족하지 않고 오감을 자극하며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 최고치로 정점을 찍는 확진자 수를 확인하며 주변 여러 현상이 포물선 운동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비록 갇힌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보이는 프레임 바깥에서 닿는 봄을 기록하고 기억해 보련다. 더 이상의 시간들이 사라지지 않게.
수학은 우리에게 포물선 위 꼭짓점을 알려주지만 삶은 꼭 포물선 위가 아닌 바깥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프레임 바깥세상을 상상하며 살아야 한다. 사실, 삶은 포물선 위보다는 바깥에 있을 확률이 훨씬 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