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경험에서 찾아오는 행운을 알아차리자
'잘 살아가고 있는가?'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모모를 향한 연민,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사랑하며 내가 존재해 있는 이곳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삶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과연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며 살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깊숙이 누른다. 그러자 집착하고 있는 듯한 삶이 더욱 허무해진다. 마음의 끈은 뿌리를 찾지 못한 채 허망하게 엉켜있다. 이럴 때는 먹고 또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성공한 삶도 실패한 삶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걸었던 그곳에 나의 삶이 있었다. 그 삶 곳곳에서 지난 시간의 나를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의 삶에 과몰입하면서 몸살이 찾아오고 온몸에 진통이 전달되었다. 자신이 지독하게 의미를 부여한 것, 배움과 그것을 다시 가르침 그리고 책을 제외하면 그들과 그 속에 속해있는 나는 모든 삶에 대해 관조적이었다. 관조를 넘어서 회피한 삶을 살았는가? 자식과 연인에게, 관계하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에 있어서는 잠시 적극적인 노력을 보이는 거 같지만 결국 관조적으로 마무리 짓는 행태를 보였다.
평범하였기에 우리는 조금씩 움직였으며, 끝도 없이 펼쳐진 철교 위를 걷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대교 위를 다 건너간 후 허무함의 무게 탓인지 뒤를 돌아본 순간에도 특별한 쾌감은 없었다. 대교 위에 처음 진입했을 때, 지나가는 차를 내 시선으로 바라보며 느껴지는 속력이 걸어가는 움직임에 따른 상대적인 속도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내 걸음의 빠르기와는 상관없는 절대적인 속도였다. 어떤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향해 처음과는 달리 빠른 목적 달성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지금 막 대교를 걸어온 우리를 절망하게 할 것이다.
삶에서 내가 기대하는 건 평범함이었을까?
20대의 나는 그들과는 달리 특별한 삶을 살고 싶었다. 평범한 듯 특별한 삶에서 벗어나 내가 주도하는 삶에서 다른 용기를 내고 싶었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실천하던 삶은 의도치 않게 엄마를 힘들게 했다. 결혼이라는 섣부른 도전을 하기 전까지 나를 가장 지지해 준 보호벽은 항상 엄마였다. 그 보호벽은 엄마를 고난이라는 블랙홀에 빠지게 했다. 결혼 후에도 방어벽으로 자식을 지키고자 애써왔던 엄마는 많이 지쳐 있었다. 어느 햇살 좋은 겨울날 이른 오후, 엄마는 지친 모습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자식의 손을 잡고 표면으로 드러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이제 그만하고 싶다며 진정한 자유를 선언했다.
긴 시간 동안의 여러 경험은 나를 절망에 내던져 놓기도 했고 던져진 삶을 더 집요하게 파헤치기도 했다. 관절이 더 이상 고통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삶의 무게가 몸 전체를 짓눌렀다. 캄캄한 초행길을 정신없이 방황하다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헤매면서도 이젠 절대 내비게이션에 의지 하지 않겠다며 과감히 꺼버린다. 잠시 후 눈에 비친 길을 향해 출발한다.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다. 엄마의 방어벽과 같은 인생의 나침반이 사라지면서 나약하기만 할 줄 알았던 숨어있던 의지가 단단하고 영향력 있게 제자리를 찾아온다.
그때부터 자신의 의지로 움직임이 시작된 길에서 나는 새로운 빛을 보았다. 그 빛 끝에는 의지와 노력이 주도적으로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엄마가 선언한 진정한 자유에는 행복을 알아차린 것도 포함되어 있었을까? 삶에 대해 과연 스스로 무엇을 기대하며 대부분의 감정은 선을 긋고 살아왔을까? 부분집합이라는 거... 감정에서는 예외로 두고 있었다. 행복감이라는 감정 안에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감정, 평안함과 안도감은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감정들이 행복감의 부분집합이며 그중 하나라도 충만될 때 행복감은 넘친다.
크고 작게 굴곡진 삶을 다양한 다항함수로 표현해 본다면, 우리의 삶은 주기 함수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기 함수 곳곳에 어느 시점의 행복감, 상대적으로 불행한 감정까지도 순간 기울기로 표현할 수 있다. 삶 속에는 어느 곳에서든 행복감은 숨어 있다. 상대적인 감정 역시 언제든 발현되며 벽을 뚫고 나올 수도 있다. 그 감정들을 꼭꼭 감추며 콘크리트 벽속에 가두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불편함에 속해있는 행복을 찾았다. 또한 익숙하고 편안함 가운데서 소소하게 숨어있는 행복을 발견했다.
주기 함수의 어느 접점에서의 접선의 기울기를 미분계수라고 한다. 접선의 기울기인 미분계수에서 숨어있는 감정, 행복감, 불행한 감정 모두 어떤 경험으로든 표현되며 동시에 알아차림이 시작된다. 물론, 알아차림의 시작이 곧 행복이다.
어느 날, 새벽 기상을 통하여 다른 공간 같은 시각 의식의 흐름이 공유됨을 알아차렸다. 이후 미세한 감정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자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의 부분집합인 나, 우주에 온전히 속해있는 나를 알아차린 것이다. 사실로 존재하는 것을 마치 진실을 외면하듯 믿지 않았다. 행복의 시작인 감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보호벽이었던 엄마의 숨결, 호흡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엄마는 몹시 지쳐 있었다. 이젠 그것이 사랑이라고 우기며 견디기를 바랐던 나의 무례한 감정까지도 보인다. 그 쯤 진실을 볼 수 있게 도와준 자연이 전한 메시지들을 감사히 받기 시작했다.
자연이 끊임없이 던지는 메시지는 해를 더하면서 더욱 강력하고 거칠게 전달된다. 우리가 진실로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느린 속도로 전달하다 주기는 점점 빨라졌다. 어머니의 사랑을 품은 자연이 어느 순간 던진 메시지가 심상치 않다. 자연을 아프게 한 너와 나에게 경각심을 깨워준다. 이젠 자연의 큰 사랑이 두려워진다. 지금까지 경고를 외면했던 우리에게 삶의 끝자락에서 마지막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현실이 된 경고는 긴 시간 강력한 힘을 잃지 않고 변이의 모습을 거쳐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이젠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 행운이 아닌 척 찾아온다. 우리는 계주에서 마지막 주자의 노력과는 다른 모습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공존이라는 다른 방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