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평소와 달리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이불 속에서 핸드폰을 쓴다고 뭉그적대지 않고 답지 않게 차분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치약을 짜며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켰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사람들이 눈 오는 사진과 영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눈?! 어젯밤에도 울긋불긋한 단풍나무를 봤는데?! 눈이 휘둥그레져 칫솔을 입에 문 채 베란다로 달려 나갔다. 아직 채 쓸리지 않은 바닥 위로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행복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그 행복이 행여 달아날까 싶어 사진과 영상부터 찍고 빠르게 나갈 채비를 했다.
어떤 카페를 가면 가장 이상적일지 고민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행선지를 정하지도 못하고 나와 걷는 눈길이 차가웠다. 운동화가 눈 사이로 움푹 파고들며 뽀드득 소리를 냈다. 여전히 어느 카페에 갈지도 못 정했고, 몇 걸음마다 미끄러져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지만 그럼에도 생글생글 웃음만 새어 나왔다.
때마침 문을 연 베이커리 카페가 있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나밖에 없어 조용했다. 신중히 고른 모카번과 커피에서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그야말로 낭만이었다. 겨울에만 즐길 수 있는 낭만이었고, 실은 프리랜서라 즐길 수 있는 낭만이었다. 지금 시간은 열 시. 9시에 일어나는 것도 아침 일찍이고, 눈이 오는 출근길도 즐거우며, 커피와 빵을 들고 카페에 앉아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것까지 모두 회사에 소속되지 않아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뜨거운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밖이 뿌예져 보이지 않았다. 낭만은 여기까지인가 싶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일해야지. 가방을 열어 노트북을 꺼내고, 외장 하드를…. 어라? 외장 하드를 두고 왔다. 참나, 마우스가 꼭 필요한 작업인데 마우스도 두고 왔다. 눈의 마법일까? 평소라면 돈과 시간이 아까워 짜증이 났을 텐데 오늘은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마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점심 식사를 끝마치던 때 짝꿍에게 전화가 왔다. 점심시간이라 전화를 걸었나 싶어 받았더니 잠시 내려오란다. 집 앞이야?! 놀란 마음으로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뛰어 내려가니 1층에서 우산을 쓰고 기다리고 있었다. 온통 하얘진 세상에 까만 패딩을 입고는, 또 새하얀 얼굴로 씩 웃는다.
"산책하자."
지금이 아니면 이 풍경을 다신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찾아왔다는 말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슬리퍼 사이로 눈이 스며 들어온다. 차디찬 눈이 녹으며 발끝이 아려온다. 그래도, 즐겁다. 아파트 화단을 한 바퀴 돌며 아직 누군가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들을 구석구석 살피고 사진을 여러 장 찍어댔다. 우산 밖으로 뛰쳐나가 눈밭을 어지럽히고 돌아보면 귀 끝까지 빨개진 짝꿍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는 다시 주머니 속에 같이 손을 찔러넣었다.
"안 그래도 지금 딱 같이 예쁜 카페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와서 깜짝 놀랐어!“
그러면 옷에 쌓인 눈을 털어주던 짝꿍은,
"그럴 것 같아서 빠르게 마무리하고 넘어왔어. 우리 카페 가자."
하고 눈을 마주쳐준다.
옷을 갈아입고 이번엔 외장하드도 마우스도 모두 챙기고, 혹시 몰라 책 한 권도 추가로 챙겼다.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느긋한 대화를 나누며 집을 나섰다. 어느새 더 거세진 눈에 온 세상이 하얘지고 있었다. 하늘은 물론이고 앞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설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우린 함께인 덕에 깔깔대며 걸었다.
우리는 좋아하는 카페에 도착해서도 각자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때때로 창밖의 풍경을 즐기기도 하고, 산타 마을이니 루돌프 요정이니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즐겁게 일을 했다.
만약 내가 여전히 회사에 다니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연차를 쓰면 가끔 예쁜 카페에 가 이런 시간을 누릴 수도 있었겠지만, 아침에 갑작스레 눈이 온다고 연차를 쓸 순 없었을 거다. 쏟아지는 폭설을 뚫고 출근하는 길이 고되게 느껴졌을 수도 있고, 그 때문에 지연된 지하철을 탄다고 조마조마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탄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고, 낑긴 채로 겨우 회사에 도착하면 이미 녹초가 되어 일은 하기도 힘들었겠지. 그래도 열심히 일하고 점심에는 잠시 낭만을 즐기며 동료들과 하하호호 웃었겠지만, 퇴근길은 다시 암담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이미 거뭇거뭇해진 눈길에 아쉬움도 느꼈을 테고, 그 눈길에 미끄러질 때면 오늘 같은 웃음이 아니라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을 것 같다.
이렇게 쓸 수 있는 건 내가 그날들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몇 년간 꾸역꾸역 버티던 날들도 모두 애틋하고 나름의 특별함이 있지만, 역시 지금의 이 낭만도 놓칠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던 시각은 아직 4시였는데도 벌써 길바닥이 새카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발길과 매연에 까맣게 눌린 길이 아쉽다. 이 풍경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요즘처럼 눈이 펑펑 오지 않는 때는 더더욱 귀한 행복이겠지. 우리는 아까 그 시간과 풍경을 잊지 말자고 몇 번이고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감사히 여기고, 소중히 생각하자고.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꼭 이 마음을 기억하자고.
힘든 시기들을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건 분명 이런 기억들일 것 같다. 프리랜서의 낭만을 오래 지키려면 평소엔 더 치열히 살아야 하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오늘도 오전과 오후의 낭만을 끌어안고 그 기억으로 새벽 2시까지 일했다. 자유에 대한 책임이다. 그럼에도 눈의 마법으로 새벽 2시에 실실 웃으며 누울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내일도, 모레도 남은 올해도 모두 이날을 기억하며 힘차게 나아갔으면 좋겠다.
몇 일 전 눈이 왔었죠?
지금은 벌써 많이 녹아내렸더라고요.
눈 오는 걸 좋아하는데,
이른 아침 눈 소식에 어찌나 즐겁던지요.
카페 가는 길에 몇 번이고 미끄러지면서도
그저 웃음이 와하하 나고,
이것저것 두고 온 걸 알았을 때도
역시나 빵 웃어버리고 말았던 날이었어요.
그걸 즐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프리랜서의 삶이 소중하고 값지게 느껴졌어요.
비록... 이후로 감기 기운에 비실대고 있지만요. ^_^..
올 겨울 역시 작년보다 더 춥다고 하네요.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