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그미 Jan 08. 2021

제삿날 풍경

닭 잡고 떡하고

음력 6월 24일. 친정 할아버지 제삿날이다.
양력으로는 가장 더운 8월이라 할아버지 제사음식을 준비할 때는 정말 땀을 비오듯하며 음식장만을 하곤 했다. 제삿날 당일 오신 친척들과 아이들로 집안은 바글바글(최소 30명), 선풍기를 하도 돌려서 열받은 선풍기가 도리어 열풍을 뿜어내던 일, 자정이 될 때까지 기다리느라 눈을 비벼가며 졸음을 쫓고, 매캐한 모깃불을 펴도 극성스레 달라드는 모기를 쫓던 밤이 떠오른다.

지난 여름의 일이다. 해남에 폭염주의보가 내렸길래 더위에 괜찮으신지 다음날 안부전화 드렸다가 할아버지 제사소식을 들었다. 아, 벌써 그 날이 됐구나!
어릴 땐 집에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였지만 결혼하고 나니 날짜도 잊어버리기 일쑤다.
엄마는 다행히 제사 당일날 이슬비가 내려서 시원하다시며 몇 가지 더 장볼 게 있어서 장에 나갔다가 들어가시는 길이라고 하셨다.

엄마랑 통화하는 소리를 옆에서 들으시던 어머님께서 통화가 끝나자 그러신다.

"오늘이 할아버지 제삿날이여?
이 더위에 제사 치르시느라 욕보시네.
할머니 제사도 여름 아니냐?"
"할머니는 봄이에요. 벚꽃 피고 복사꽃 필 무렵 돌아가셨어요."

"그래... 두 분 돌아가신 지 오래 되셨을 텐데, 자손들 힘들게 따로 하지 말고 제사를 합치재.
나 죽으면 느이 아버지 제사랑 합쳐부러라.
아무 날이나 늬들 모이기 좋은 날로~."

전에도 하셨던 말씀을 다시 하시며 어머님 어린 시절의 제사 풍경을 이야기해 주신다.

"옛날엔 제사도 많았지야. 닭 잡고 떡하고.
요즘이야 가게에서 털 다 뽑아나온 닭 사다 쓰고,
떡집에다 쌀만 맡기면 해오는 떡, 얼마나 편하냐?
떡쌀 씻어서 불리고, 떡시루에 앉혀서 가마솥에 불 때고, 이 더운디 말이다. 인절미할라믄 또 떡메로 쳐야쓰고~ 아이구 생각만 해도 징하다."

"그러게요. 옛날 분들은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그 징한 것을 어떻게 다 하고 사셨나 몰라요. 지금은 전도 다 사다가 젯상에 놓는 세상인데. 아예 모든 음식을 제사상차림 전문회사에 맡기기도 하구요."

"그런 데다 맡긴 것이 오죽하겄냐? 돈은 엄청 드는 것 같더라만 먹자껏도 없게 생겼든만.
난 지금도 제삿날 아침 되믄 우리 엄마가 풀 멕여서 빳빳하게 다림질한 한복을 차려 입으시고, 머리엔 새하얀 수건을 두르고- 음식에 멀카락 들어가믄 못 씅께 - 정게로 들어가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와, 제사때마다 그렇게 한복입으시고 음식을 만드신 거예요? 닭은 어떻게 잡으셨대요?"

"닭? 우리 엄마는 고기는 일절 입에 대도 안 하시는 분이라 닭 잡는 일도 못 하셨어야. 그런 일은 아부지가 하셨재. 지금이야 아무 때나 닭 먹고잡을 때 먹지만서두 옛날에야 그랬냐. 사위들 와야 닭 잡고, 제삿날이나 명절 되야 잡았재. 우리 아부지가 유일하게 부엌 출입하실 때가 그런 때 닭 잡는 일이셨단다."

"우리집도 닭은 아빠가 잡으셨던 거 같긴 하네요. 삼촌들이 잡거나. 마당에서 돌아다니는 닭 몰아서 날개죽지 잡고, 두 다리 새끼로 묶어서 칼로 목을 좀 딴 다음 나무청에 거꾸로 매달아놓곤 그 아래 옴막한 대접을 받쳐놓으시던 게 생각나요. 거기에 닭피가 또옥똑 떨어지다가 더이상 안 떨어지면 그릇에 모인 시뻘건 닭피를 남자어른들이 나눠마셨는데, 그 징그러운 걸 뭐 좋다고 드셨나 몰라요."

"닭피뿐이냐? 창자도 먹고, 닭똥집도 먹고, 버릴 게 없었재. 우리는 아부지가 닭 잡아서 개울가에서 손질하고 계시믄 그 앞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지야. 닭발 언제 주시나~ 함시롱.
다른 건 다 어른들 드시고, 상에 올려도 닭발은 우리몫으로 주시곤 했응께.

개울 옆에 있는 큰 도팍에다가 창자를 꺼내서 뽀끔뽀끔 거품 안날 때까지 빨아서 주무르고, 똥집에서 똥도 탈탈 털어 깨깟이 씻어내고 함서 닭 손질하시는 아부지 앞에 육남매가 줄줄이 쭈그리고 앉아서 언제 주실라나~ 하고 보고있으믄 '옜다~ 여깄다 닭발!'하고 주시걸랑.

그람 좋다고 들고 가서 소금 잠 뿌려서 석쇠에 올려가꼬 숯불에 지글지글 궈먹으믄 어찌나 맛나등가~ 입은 여섯이고 다리는 두 개뿐잉께 쪼금쪼금 나눠먹니라 더 맛있더라."

"저희집도 닭발 칼로 조사서 양념해가지고 석쇠에 궜는데, 그거 다 어른들 술안주라 어쩌다 얻어먹으믄 맛나긴 하더라구요. 뼈까지 오독오독 잘근잘근 씹어먹었는데... 전에는 닭을 집에서 다 키웠잖아요. 그러니 좀 푼하게 먹여도 좋았을 것을."

"쌀도 귀한디 고기를 그렇게 푼하게 먹을 수 있간? 제삿날이믄 엄마가 애들보고 당부하시는 말씀이
'밤에 자지 말고 제사 지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쌀밥 한 그릇 먹고 자그라잉~' 그랬당께.
평상시에는 쌀밥 귀경도 못하고 보리밥이나 먹고 산께, 제삿날에나 쌀밥 먹어보라고.

닭은 사위나 와야 잡았당께. 고모부 두 분이 계셨는디, 그 분들 오셔야 닭고기 냄새를 맡았재.
그나마도 살은 다 손님상 나가고, 살 쪼카 붙은 뼈따구로 한솥 가득 미역국 끓여서 먹으믄 그것도 고기기름 들었다고 얼마나 맛있었는 줄 아냐? 그라고 닭을 먹을라고만 키운 것이 아니재. 달걀 낳으면 달걀 팔고, 삥아리 때 사다가 키워서 웬만큼 크면 장에 가져다 팔고 그랬응께.

'가꼬'라고 쇠로 만든 망이 있어. 날개죽지를 딱 모아 묶어서 옴쭉달싹 못하게 한담에 가꼬에 넣어가꼬 장에 가서 팔았재. 그렇게 해서 집에 필요한 비누도 사고, 신발도 사고~"

"저 클 때만 해도 집에서 잡아묵을라고 키웠는데, 어머님 때는 일용할 돈으로 만들라고 닭을 키웠네요. 참 근데 그거 아세요? 닭도리탕이 순우리말이래요. 일본말이 아니라."

"일본말잉께 닭볶음탕이라고 고쳐 부르라고 난리든만 아니래?"

"네~, 닭을 부위별로 도려내서 만든 탕이라 닭도리탕이래요. 일본말로 도리가 '새'라서 사람들이 일본말인 줄 잘못 안 거래요. 할머니의 할머니, 그 위에 할머니때부터 닭도리탕이라고 불렀다네요. 일제시대 이후에 생긴 말이 아니라."

"그려? 인자 닭도리탕이라고 불러도 쓰겄구만. 하도 일본말이라고 뭐라 해싼께 눈치 보며 닭볶음탕이라고 고쳐 부르느라 심들었는디.
난 시골 살 땐 닭도리탕이 뭔줄도 몰랐다. 서울 올라와서 처음으로 이런 음식이 있구나~ 하고 알았재. "

"저두요~ 광주 살 때도 못 먹어봤던 음식을 서울 와서 처음 먹었어요. 특히나 아범이랑 연애할 때 집에 놀러간 날 언젠가 어머님이 해주신 닭도리탕이 진짜 맛있었어요. 제대로 먹은 닭도리탕은 그게 처음이었을 걸요, 아마."

그뿐이랴. 어머님표 황석어젓갈도 최고였다.
난 지금도 '어머님의 요리', 하면 닭도리탕과 황석어젓갈을 떠올린다.

"날 좀시원해지믄 닭도리탕 만들어묵자~
지금은 불앞에만 있어도 땀난다."

"네~ 어머님^^"

국민음식이자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K-food가 된 치킨에 이어 닭도리탕도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사는 이제 정말 간소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자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돌아가신 분을 떠올리며, 좋은 추억과 함께 한끼 조촐하게 먹는 자리 정도로.


* 2020년 광복절에 썼던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새벽 4시, 눈속 산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