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삼사 년 전까지만 해도 기호랄 게 없었다. "뭐 먹을래?"라는 질문에는 "아무거나"라고 답했다. 생각 없이 사들인 옷은 한 사람의 옷장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중구난방이었다. 좋아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답하려면 뜸을 들여야 했고, 끝내 답을 하고도 확신 없이 말 끝을 흐리기 일쑤였다. 남들이 해외여행을 간다니까 나도 해외여행이 가고 싶었고,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라니까 나도 그렇게 입고 꾸미고 싶었다. 나에게 밸런스 게임은 세상 어떤 게임보다 어려운 게임이었다.
"엄마는 뭘 좋아해?"
첫째가 세 돌 때쯤 되던 때, 나의 기호를 물어왔다. 뭘 좋아하냐는 두루뭉술한 질문에서 시작해서, 점점 구체적인 것을 묻기 시작했다.
"엄마는 어떤 음식을 좋아해?"
"엄마는 어떤 색깔을 좋아해?"
"엄마는 어떤 모양을 좋아해?"
"엄마는 뭐 하고 노는 걸 좋아해?"
"엄마는 다 좋아해"
"에이, 그런 게 어딨어. 골라봐 딱!"
아이의 밸런스게임은 난도가 높지 않았음에도 선택이 쉽지 않았다. 답을 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질문 세례를 받으며, 그제야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을 무척 어려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게 불편했다. 그냥 두루두루 섞인 삶을 살고 싶었다. 하나를 선택해서 말하자니 이것도 조금 좋고 저것도 조금 좋았다. 꼭 그만큼의 마음으로 이것도 조금 별로고 저것도 조금 별로였지만. 아무튼, 내 기준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보다 타인의 기준에 따라가다 보면 리스크가 덜했다. 조금 별로인 마음을 덮어두고, 조금 좋은 마음에 집중하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결과가 돌아왔다. 선택하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남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기웃거리는 데 에너지를 쏟거나 아예 선택하기를 포기하는 편히 훨씬 편했다.
계속되는 아이의 질문은 불편했지만, 자꾸 고민하게 했다. 그래서 진짜 내가 좋아하는 건 뭐지?
아이의 답은 거침이 없었다. 경험이 적어서 선택이 덜 힘든 걸까. 어쩜, '다 좋아, 아무거나'라는 대답을 한 번도 하지 않는 걸까. 나에게는 익숙한 답이 아이의 답안지에는 단 한 번도 쓰이지 않는 걸까. 첫째보다 두 살이 어린 둘째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키우고 싶었던 것 같다. 자기 앞에 놓인 선택지들 앞에서 우물쭈물하지 않도록. 두 아이 모두 세 돌이 지나서부터는 스스로 옷을 골라 입도록 했고, 네 돌이 지나서부터는 등원 때 한 번도 옷을 입혀주지 않았다. 식사를 준비하기 전에 먹고 싶은 것을 먼저 물었다. 옷을 사러 갈 때도 꼭 아이들과 함께 갔고, 스스로 옷을 골라보도록 했다. 서점에서도 원하는 책을 사도록 했고, 장난감을 사러 가서도 (가격의 한계만 정해주고) 원하는 것을 사도록 했다. 주말이면 하고 싶은 것을 먼저 물었고, 함께 주말 계획을 세웠다.
당시에는 사소하게 느껴지던 것들이 차곡차곡 쌓였던 모양이다. 이제 다섯 살, 일곱 살이 된 두 아이는 기호가 제법 분명하다. 여전히 두루뭉술한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나로서는 아이들의 분명함이 불편하기도 하고 버겁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들이 나보다 더 빠른 시기에 스스로를 잘 알아차리는 삶을 살게 되리라 생각하면, 내가 감당하는 불편과 버거움쯤이야.
끝없이 이어지는 아이의 질문 세례에 나도 내 기호를 조금씩 찾아간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너 먹는 거 같이 먹지 뭐, 네가 보기엔 어떤 게 나한테 어울려?' 입버릇처럼 답하던 말들이 혀끝에 맴돌 때마다 마음을 집중한다.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 나는 이게 먹고 싶어. 내가 보기엔 나한테 이게 더 잘 어울려. '
내 앞에 놓은 선택지는 내가 선택하고 싶다. 더는 한 발 물러서 누군가의 선택을 따르거나 기다리고 싶지 않다. 꼭 그 마음으로, 아이들도 스스로의 삶을 잘 선택하며 살아갔으면 싶다. 제 삶의 주인공으로, 한 장면 한 장면 정성껏 꾸려갔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