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는 40대 중반의 빼빼 마른 여자였다. 재발성 뇌종양, 뇌에 암이 다시 생겨 벌써 여러 번 수술을 했다고 전산 기록에 쓰여있었다.
몇 번이나 반복된 종양 제거술을 이번에도 겨우 마치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활력 징후나 피검사와는 별개로, 환자는 한눈에 보아도 몹시 지쳐 보였다.
전신을 마취하고 머리뼈를 열어 몇 시간이나 지속되는 장시간의 수술, 벌써 여러 번, 또 아직도 더 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앞에서 보통사람이 지치는 것은 분명 당연하다.
그녀는 물에 적셔진 솜처럼 무겁고 축축해서, 조금씩 가라앉았다. 식사도, 투약도, 재활치료도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우리는 크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이 시국'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을 불러 면회를 시켜주기로 했다.
몇 분 뒤, 신경외과 중환자실 2번 격리 방에는 침상 난간보다 작은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엄마 얼굴을 보려고 까치발을 들고 있는, 작은 손 두개를 엄마 손등에 포갠 일곱 살짜리 아들.
"엄마, 아파서 계속 누워있어도 되니까 나 초등학교 4학년 될 때까지는 살아있어야 돼. 나 이제 엄마 말 잘 들을게. 반찬도 차려주는 거 잘 먹을께."
아이들의 말에는 그 고유한 속성이 가진 특별한 힘이 있다. 어떤 의도도 없고, 과장도 없어 속이 투명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언어들. 그 순수하고 반짝이는 한마디에 일순간 그 공간이 소실점이 된 듯 시선이 한군데로 모여서 멈췄다. 멀리서 면회를 지켜보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이 조용히 글썽였다.
순수함은 힘이 세다. 그 한마디에 환자는 다시 엄마가 되었다. 어떤 통증과 절망 속에서도 엄마는 아이 앞에서 웃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엄마라는 존재는 세상 어떤 것들보다 더 세다. 그녀는 다시금 억지로 미음을 떠 입에 넣는다. 적어도 아이의 바람대로 몇 년은 더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다.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과학이고, 사람을 계속 살게 하는 것은 각자의 이유였음을 아이의 목소리를 통해 상기하게 된, 깨끗한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