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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 만한 간호사 Jan 28. 2022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정

     

1.

노부부는 이십 년 동안 둘이서만 살아왔다고 했다. 두 분 다 80세가 훌쩍 넘은 연세였던 걸로 보아 그들은 이미 인생에서 많은 것들을 이뤄내고, 또 잃은 뒤에야 만나 함께하셨을 터였다.

아마 두 분의 시간은 별 일없이 느긋하게 흘러갔을 테고,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챙기는 것을 보아하니 오래도록 서로밖에 없는 삶을 사셨을 것 같았다. 끝이 잡히지 않을 것 같던 평화로운 날들은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위기를 맞았다. 

2.

황급히 출동한 119 대원들의 근 20여 분간의 심폐소생술로 신체는 어떻게든 살아났으나, 병원에 도착했을 무렵 그의 눈동자의 크기를 보니 영혼은 이미 진작에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이 합리적인 의심은 연이어 실시한 MRI와 뇌파검사에서 확진되었다. 이미 한번 뇌가 심각한 저산소성 손상을 받은 경우 의학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극히 적다. 사실 아직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없다. 이는 앞으로의 치료 계획은 보호자에게 달렸다는 의미이다. 깨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80대 노인을 같은 나이 또래의 할머니 혼자 스스로 얼마나 돌볼 수 있을 것인가. 할아버지는 생전에 연명 치료에 관련된 의사 표현을 전혀 한 적이 없었으므로 어떻게 보면 앞으로 할아버지의 생사는 전적으로 보호자에 의지에 대한 문제였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여태 시행한 응급검사들의 동의서를 득하고, 앞으로의 치료 계획 등에 대해 상의해야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심장 혈관이 막혀서 심장이 멈췄어요. 심폐소생술로 할아버지가 지금 육체는 살아계시지만 저희가 검사해보니 뇌가 손상이 심하게 오셔서 깨어나시기는 많이 힘들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할아버지 치료 계획에 관해 얘기 나누고 싶은데 혹시 다른 가족분들은 안 계세요?"

"가능성이 전혀 없는거여? 다른 가족들은 아무도 없는데.. 그냥 살려만이라도 주셔. 제가 매일이라도 병원에 왔다 갔다 할 테니까. 그냥 얼굴이라도 보게. 선생님이 도와주셔."

할머니는 부드럽게 부탁하는 투로 말씀하셨지만 그 텍스트 안에 담긴 의지는 완고했다. 우리는 최대한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하기로 했고, 할머니의 부탁대로 면회를 시켜주었다. 할머니는 슬픈 눈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보다 금세 물수건으로 할아버지 팔다리와 얼굴을 구석구석 씻겼다. 울음을 참고 계시는지 얼굴의 주름이 한층 더 자글자글 해 보였다.

그때 원무과에서 전화가 왔다.

"내과계 중환자실이죠? 그 입원하신 중환자의학과 K 어르신이요. 아들한테 전화가 왔는데요. 할머니가 친 보호자가 아니라는데요."

3.

이게 무슨 상황인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할머니를 모시고 상담실로 가서 얘기를 들어보니, 온화하던 할머니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화를 냈다.

"그 아들놈이 무슨 낯짝이 있다고, 인제 와서 연락을 했답니까. 이미 우리 할아버지랑은 내가 같이 살기 훨씬 전부터 의절한 사이랍디다. 하도 속을 썩히고 할아버지 돈만 빼돌려서 아예 호적에서 파 버렸다고 했는디. 나는 그 사람 얼굴도 모르고 할아버지랑도 연락 한번 하는 걸 못 봤습니다. 우리는 둘이서만 오랫동안 살았어요. 우리 나이가 되면요, 혼인신고나 결혼식이나 이런 것들은 우스워진다오. 같이 의지하고 밥 같이 차려먹고사는 게 중요하지 그런 것들은 언제든 필요할 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바깥양반이 또 동네에서 소문난 부자라서 주위 사람들이 내가 돈 보고같이 산다 흉볼까 혼인신고해달라 얘기도 못했어요. 이 나이에 내가 얼마나 더 산다고 유산 같은 거 보고 만났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저 나이 먹고 재혼한다고 손가락질하는 건 똑같습디다. 그런데도 우리는 꿋꿋이 20년이나 함께 살았어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보호자가 아니라고 할랍니까?"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살아온 20년간 손가락질하는 주위 사람들 눈치를 살피며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할머니는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 노부부가 겪어야 했던 부당한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옛날 사람들이 살아온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 마음속 어딘가에서 남들을 흉보는 게 사람들의 본성 중 하나인지는 몰라도 할머니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간 겪은 설움이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병원의 보수적인 속성에 따라, 내가 크게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할머니. 사정은 잘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법적 보호자인 친아들이 이미 연락이 와있고 할아버지를 보겠다고 하니 제가 할머니도 따로 할아버지 면회하시는 데 불편함 없게 한번 잘 말씀드려 볼게요."

4.

아들은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어딘가 불안한 사람처럼 말이 빠르고 자주 더듬거리는 말투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와 며느리는 면회하는 내내 할아버지를 한 번도 만지지 않았다. 그저 멀찍이 서서 위를 쳐다보며 미간을 잡고 눈물을 참는 듯한 시늉을 했는데, 할머니 얘기를 들은 탓인지 억지로 쥐어짜는 어색한 연기처럼 느껴졌다. 몇 분 안 되는 면회를 마치고 그들은 곧장 내게 와서 '그 같이 왔다는 할머니'에 관해 물어보았다. 면회는 둘째치고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상태 설명 같은 것도 해줄 필요 없으니 전화번호를 아예 지워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그 사람'과 같이 살게 된 이후로 자기를 아예 인생에서 내쳤다면서, 할아버지가 이렇게 된 건 다 그 사람 때문이라고 힐난했다. 편견 때문일까, 내 눈에는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이런 사생활을 털어놓는 모습까지도 어쩐지 미심쩍게 느껴졌다. 나는 방금 전 할머니와 약속한 대로, 보호자를 설득하려고 얘기를 꺼냈다.

"할아버지랑 워낙 오래 사셨고, 원래 상태나 드시던 약들에 대해서 앞으로도 여쭤볼 일들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다른 건 원하지 않으시고 그저 면회만 하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둘이서 고민을 하고 속닥거리더니, 그럼 자신들과 겹치지 않게 면회하고 양쪽에 따로 설명을 해주면 된다는 조건으로 면회를 허락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아들은 그 뒤로 딱 한 번 더 면회를 왔다.

5.

할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마다 할아버지를 와서 닦고, 쓰다듬고, 쳐다보면서 면회시간을 밀도 높게 썼고 오후에도 잊지 않고 전화해 그 간 별일이 없는지 확인했다. 누가 봐도 매일 왔다 갔다 하기 힘드실 나이에 저렇게 하는 모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럼에도 결국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마지막 순간, 아들네 가족은 어쩐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할머니에게 면회를 절대 시켜주지 말라고 얘기했다. 이를 담당 간호사에게 전해 들은 할머니는 밖에서 소리 나게 울었다. 그간 참아왔던 설움이 폭발이라도 한 것처럼, 큰 소리로 엉엉 우셨다. 할아버지가 쓰러져 중환자실로 올 때도, 더는 회복하실 가망이 없다고 할 때도 의연하게 사람들 앞에서 눈물짓지 않고 버티셨는데, 보고 있자니 속이 무척 시렸다. 그래서 나는 친 보호자에게 가서 설득했다. 20년이 넘게 사셨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지도 못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다고, 할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할머니는 병원에 하루도 빠짐없이 오셔서 할아버지 옆에 계셨었다고. 

어쩌면 내가 선을 밟은 채 행동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날 할머니 울음소리가 내 등을 계속 밀었다. 아들은 결국 면회를 허락했다.

결국 중환자실 대기실 앞에서 무너져있던 할머니를 부축해서,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드렸다. 그렇게 서럽게 우시던 할머니는 정작 할아버지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그간 고마웠다며, 여태 같이 고생 많이 했다고, 머지않아 곧 갈 테니 푹 쉬고 있으라고 초연하게 말하며 작고 주름진 손으로 몇 번이나 할아버지 이마와 볼을 쓰다듬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길어서일까, 아니면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시는 걸까,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의 마지막 인사는 대개 이렇다. 죽음 앞에서도 현명하고, 의연하다. 눈물 없이 건네는 단어들이 묵직하게 주변을 울린다. 할아버지는 결국 운구차에 태워 아들이 정한 장례식장으로 모셔졌다.

6.

그 이후로 약 한 달쯤 지났을까, 할머니가 뜬금없이 중환자실에 찾아왔다고 했다. 내 이름을 찾으며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며. 무슨 일인가 싶어 병원 번호로 전화를 드렸더니 만나서 얘기해야 할 것이 있다며 시간 오래 안 뺏을 테니 잠시 들르시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편지를 써서 오셨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처럼 쉬지 않고 얘기를 하셨다. 그때 면회를 시켜줘서 고마웠고 덕분에 할머니는 처음으로 보호자가 된 것 같았다든지 하는 얘기들부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그 아들 새끼가 장례식장에 자기는 출입도 못 하게 했다던 얘기부터 재산상속을 받으려고 눈에 득달같이 불을 켜고 자기에게 소리를 지르던 얘기라던가 그런 얘기들까지. 할머니는 모든 얘기를 다 쏟아붓고 나서야 자기가 시간을 뺏어서 너무 미안하다며, 얘기 들어준 것까지 고맙다고 앞으로 하는 일 잘되고 건강히 지내시라고, 편지만 한번 읽어달라고 하고는 가셨다.

할머니가 가시고 나서 열어본 편지 봉투에는 현금 5만 원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 돈을 어찌 처리할지 몰라 내 돈을 조금 보태 그날 근무하던 간호사들에게 커피를 돌렸다.

사실은 그러고 나서 몇 달 뒤에도 전화가 왔다고 했다. 다만 나는 더 이상 할머니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애초에 이렇게 만나서 얘기를 듣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겠어서 아직 답신을 드리지 못했다. 행여나 또 무언가 챙겨주실까 봐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고. 시간이 조금 흐르고 그 당시에 내가 과몰입했던 감정이 희석되자 이제 그 사건에서 어느 쪽이 착한 편인지, 어떻게 되는 게 맞았는지에 대한 판단도 흐려지고 애당초 내가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심이 들게 되었다. 만약 저 아들이 정말 극단적으로 나를 몰아붙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아들 말대로 할머니 때문에 둘 사이가 틀어진 것이라면 나도 굳이 나서서 쓸데없는 일을 한 걸까.

7.

이 일을 하다 보면 어디까지 공감하고, 어느 선까지 개입해도 되는지 헷갈리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스테이션에서 고개를 들고 보니 많은 침대에 제각기의 인생들이 누워있었다. 지금은 환자라는 이름으로 누워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여기 오기 이전에 쌓아 올린 삶과 사람들. 그런 복잡한 사정을 감히 스스로 판단하고 참견하려 하는 것은 무척 아슬아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럴 자격이 없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이 아닌, 생명을 붙잡는 데에 존재 이유가 있으므로.


결국 나는 그 뒤로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마지막에 뵈었을 때 나눴던 얘기들로 유추했을 때 무척 복잡한 날들을 보내고 계시긴 할 것 같았다. 아마 앞으로도 알게 될 일은 없겠지만 그저 그냥 사람으로서 다른 것들보다 부디 할머니께서 앞으로 건강하신 채로 더 이상 남들 눈치 볼 일 없이 사셨으면 하고 바란다.

그래서 남은 여생만큼은, 어디서 더는 엉엉 우실 일 없게 편안하게 지내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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