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ipei, Paper St. Coffee Company
한 여름의 꿈만 같았던 유럽 여행을 다녀온 지 1년이 지났다. 여행자의 신분으로 신나게 놀다가 다시 학생으로 돌아와서 공부만 하다 보니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여름 방학 때 교수님들을 따라서 캄보디아로 교육 봉사를 다녀오기도 했지만, 여행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느낌이었다. 겨울에 다시 한번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괜찮은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추위를 너무 잘 타는 체질이라서 따뜻한 동남아시아 쪽으로 여행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서의 작은 트라우마 때문에 살짝 망설여졌다. 캄보디아에서 가방을 통째로 도난당하는 사건 때문이었다. 원래 동남아시아 국가의 치안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유럽여행을 하면서 샀던 선글라스와 지갑, 현금 약간과 신용카드, 신분증, 유심카드 등을 모두 가방과 함께 도난당했다. 그 사건 때문에 치안이 불안한 국가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같이 여행을 가기로 한 친구가 대만은 그런 걱정이 필요 없을만큼 치안도 좋고 깨끗하다며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다. 방학이 지나고 새해가 된 지 이틀만인 1월 3일에 바로 출발했다.
대만은 다른 동남아시아 나라들에 비해서 상당히 많이 발전되어 있고 깔끔하며 치안도 좋다. 그리고 지하철과 버스는 교통카드 하나로 이용할 수 있으며 환승 시스템도 정말 잘되어 있다. 더욱이 카페 문화도 상당히 잘 발달되어 있는데, 대만의 차 문화의 오래된 역사 덕분에 카페 문화도 빠르게 발전한 것 같다.
커피 시장 제 3의 물결에 따라서, 대만에도 약 2010년 정도부터 스페셜티 커피가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늦게 공급되었지만 빠르게 발전한 결과를 보여주듯, 2016년 더블린에서 열렸던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에서는 대만 출신의 바리스타인 Berg Wu가 챔피언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번 여행에서 그의 커피를 마셔볼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 챔피언의 자리는 쉽게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화산 1914 창의문화원구 라는 많은 소품 가게들이나 전시장들이 모여 있는 유명한 곳이 있다. Paper St. Coffee Company는 그 바로 옆에 있어서 매우 찾기가 쉬웠다. 불과 3일 전에 새해가 된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창문에 2018이라는 글자가 포스트잍으로 붙어 있었다. 그리고 카페 안과 바깥 모두 깔끔한 모습이었고 그 때문이었는지 외국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카페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친구와 함께 각각 에티오피아 원두의 에스프레소 한 잔, 케냐 원두의 필터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비니 모자를 쓰고 있는 젊은 바리스타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바로 커피를 추출해서 건네주었다. 깔끔한 흰색 잔에 나온 에스프레소는 생각보다 달고 산미도 자극적인 느낌이 없었다. 심지어 그 에티오피아 원두가 내추럴 가공방식이었는데도 잘못 발효된 냄새가 거의 없이 깔끔했다. 한국 돈으로 약 3000원 정도의 가격에 이렇게 좋은 내추럴 원두를 사용한 커피를 마셔볼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다른 에피소드에서 내추럴 원두와 워시드 원두의 가공방식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내추럴 가공방식에서는 커피 체리를 일정 시간 발효를 시킨다. 그런데, 발효가 과하거나 습도 조절에 실패할 경우에는 과일 껍질을 푹 찐듯한 불쾌한 향(발효취)과 맛이 난다. 더운 여름에 과일 껍질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오랜 시간 동안 싱크대에 방치했을 때 나는 냄새를 떠올리면 된다.
과발효는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매우 세심해야 한다. 적절한 발효 타이밍을 잘 맞추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며, 아주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게 섬세하게 가공한 좋은 내추럴 원두는 발효취가 거의 나지 않으면서도 커피 체리가 가지고 있는 진한 단맛과 특이한 향 잘 배어있어서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이렇게 뛰어난 캐릭터를 가진 커피는 당연히 비싼 가격에 팔리기 때문에 위에서 좋은 내추럴 원두를 싼 가격에 맛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던 것이다.
케냐 필터 커피는 차를 마시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살짝 떫은 맛이 나기는 했지만, 녹차를 마실 때 느낄 수 있는 떫은맛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라 오히려 신선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커피에서 나는 떫은 느낌도 무조건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다. 덜 익은 감이나 가루약에서 나는 떫고 쓴 느낌이 아니라 녹차의 은은한 떫은 느낌을 커피에서 낼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캐릭터가 될 수 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의 감각기관에서 느끼는 쓰거나 떫거나 하는 보편적인 부정적 느낌들도 약간만 시점을 바꿔보면 좋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첫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뒤에 나올 다른 카페에서는 유럽에서 겪었던 것만큼 좋은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카페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그 사람들에게서 추천받은 카페에서도 좋은 기억을 가득 안고 나올 수도 있었으며 생각지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동네 음식점을 가볼 수 있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생판 모르는 커플에게 차를 얻어 타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먼 거리를 온 적도 있다.
2018년 이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2020년 1월 초, 코로나가 퍼지기 직전 기간에 대만을 한 번 더 다녀왔다. 특히 카페 두 곳을 똑같은 시기에 한 번씩 더 방문했는데, 그대로인 것들과 바뀐 것들을 구경해보니 그 기억들이 새삼 더 특별해졌다. 가능하다면 2022년의 1월에 한 번 더 가보고 싶기도 하다.
지금부터 다함께 대만으로 떠나보자.
<함께 읽으면 좋은 글: https://brunch.co.kr/@manall/6 (내추럴 커피와 워시드 커피의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