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름에 내리는 눈

에세이

by 이재 다시 원


여름 한 가운데, 우리는 겨울을 맞았다


밤늦은 택시 안, 창밖으로 번지는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이 비 오는 도로 위로 물결처럼 흩어졌다. 유리창에 기대어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는데, 라디오에서 Beanie가 흘러나왔다.


분명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도 오래전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 놓여 있던 노래처럼, 그렇게 스며들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한 음률과 무너져내리는 마음처럼 내려앉은 보컬.

원망스럽고 억울하지만 그럼에도 보고 싶은 마음.


다시는 그를 볼 수도, 만질 수도, 다가갈 수도 없다는 사실이 뼛속까지 사무치게 스며드는 밤이었다. 쓸쓸함이나 허무함 따위가 아닌 숨 막히는 듯한 강렬한 슬픔.


Hear it in your tone.

You're slowly letting go

네 말투에서 그런 말이 들려

네가 천천히 떠나보내고 있는 게 느껴져


노래 속 가사를 곱씹으며 나는 그날의 새벽을 떠올렸다.


편의점 앞의 낡은 벤치에 앉은 우리. 예전의 너는 나의 작은 변덕에도 기꺼이 웃으며 어울려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너는 내게 집에 가자고 했다. 나는 그런 너를 기어코 붙잡아 앉혔다.


맥주 캔을 따는 소리만이 공기 속에 울렸다. 너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화도, 웃음도 없이. 그저 맥주만을 급히 들이켰다.


마치 이 자리를, 이 시간을, 그리고 나를 서둘러 지나치고 싶다는 듯이. 아니, 그보다 더 먼 곳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눈치였다. 어디로 가려는 걸까. 너는 돌아올 곳이 나라고 했었으면서. 그 순간 마음속에만 울렸던 말은, 돌아와.


그날부터 나는 직감했다. 우리의 계절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가슴 안팎이 단단히 조여와 숨이 가빠졌다. 너로 인해 비어버린 심장 속에는 허무함만이 차가운 물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두 손으로 불씨를 감싸 쥐듯 부단히도 애를 썼다. 꺼지지 마라. 아직은 늦지 말았어라. 그러나 너는 돌아오지 않았다. 택시 안 라디오에서 계속 노래가 흘러나온다.


Are you turning off your phone?

Feelings turn cold.

핸드폰 꺼 놓고 있어?

차갑게 변한 것처럼 느껴져. 감정이 식은 거야?


그 한 줄의 가사가, 마치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한 대답처럼 들렸다.


그럼에도 너는 끝내 나를 놓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너를 놓게 만들었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걸까. 하지만 그런 건 너무 비겁하잖아.


한때 나를 사랑하던 너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온기는 어디에 묻힌 걸까.


너도 나도 사랑에 미숙한 사람들이었다.

너는 불이 무서워 그 따스함마저 포기했고

나는 불을 잃기 싫어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니 온도가 맞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


그래도 아직, 네가 그립다. 하지만 그리워한다고 돌아갈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걸, 이제는 안다.


누군가의 온기가 식는 순간, 우리는 계절보다 먼저 겨울을 맞는다.


그리고 그 겨울의 첫눈은, 마음 위로 내린다.


(사진출처: pinterest)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