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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저 Feb 26. 2019

고통 앞에서 나 이외에는 완벽한 타인

남편에게서 오후 들어 갑자기 배가 찢어질 듯 아프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회사에서 조퇴해 근처 종합병원 응급실에 갔다. 나도 기사를 서둘러 마감하고 병원으로 갔다. 평일 저녁 응급실은 예상외로 초만원이었다.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간호사는 차갑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노련하게 단련된 ‘적정 수준’의 친절한 말투로 응급실 베드에 누워 있는 남편을 보며 물었다.  


“환자부-운, 많이 아프세요?”

“네… (자신의 복통 증상을 주절주절 설명하기 시작한다).”


간호사는 유니폼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초등학생 필통에 흔히 들어 있는 15센티미터 플라스틱 자처럼 생긴 것이었다. 눈금 대신 1부터 10까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1에는 평온한 표정의 ‘노란 스마일’이, 10에는 ‘빨갛게 열이 오르고 엉엉 울고 있는 스마일’이 그려져 있었다.


“네, 환자부-운. 그럼 지금 아프신 정도를요, 조금 아프다는 1, 많이 아프다를 10으로 해서요, 어느 정도로 아프신가요?”


남편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순간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마치 수술을 할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엄중한 기로에 선 명의처럼.


“(혼잣말하듯) 7… 8…? (점점 크게) 음, 지금 7이에요!”


간호사는 알겠다고 했다. “조금만 누워 계세요, 환자부-운” 하는 말투가 영 초등학생을 달래는 것 같았다. 조금 만이란 게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것이 10분이나 20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남편에게 간호사와 의사가 온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기 때문이다. 의사는 남편의 배 이쪽저쪽을 꾹꾹 눌러보며 간단한 문진을 했다. 진통제 처방을 받고 남편은 응급실에서 나왔고, 나중에 다시 아프면 MRI를 찍어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서 퇴근하고 온 남편이 분하다는 듯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아니, 그때 7이라고 할지 8이라고 할지 열라 고민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10이라고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였대!”   

‘고통 레벨’이 10일 때만 응급상황으로 판단하고 즉각적인 처치가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남편에게는 7 혹은 8도 굉장히 아픈 거였는데 말이다(남편은 나중에 정밀검사를 받으니 출산의 고통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담석증으로 진단이 나와, 결국 쓸개를 떼어냈다. 이런 쓸개 빠진…).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일지도?


내가 아는 유일한 간호사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가장 결혼을 늦게 할 것 같았는데 친구들 중 제일 먼저 결혼해 애를 둘이나 낳았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에 가장 젬병이었는데 종합병원 간호사가 된 반전의 아이콘인 친구다. 남편의 억울한 소식을 전했더니 친구가 내놓는 말이,

“야, 미쳤냐. 바빠 죽겠는데 10 아니면 거들떠도 안 봐!”

“그럼 9는?”

“9도 안 봐!”    

     

나부터 좀 먼저 봐달라는 심보로 응급실에서 무조건 “저 10이에요!”부터 외치려 들면 큰일 난다. 그러면 응급실이 아비규환이 될 거다. 촌각을 다투는 진짜 고통 10의 위급한 환자가 당연히 우선이다.


억울해하면서 씩씩대는 남편을 보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고통을 남이 고스란히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한번 학습했으니 남편은 앞으로 조금 덜 실망할 것이다. 내 고통을 남이 그대로 알아주길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어서 남이 알 수 없을뿐더러 사실은 구태여 알려고 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고통에 둔감한 남에게 서운해할 이유도 없다. 고통 앞에서 나 이외에는 완벽한 타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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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이 포함된 에세이는 《오늘도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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