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나를 위한 변명
속 마음이야 어떻든 나의 제안에 덮어놓고 '싫다'라고 말하거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사래 치며 - 이럴 땐 정말 힘없는 노인이 맞나 싶다 - 고개를 내젓는다.
네 살 아이야 귀엽기라도 하지, 일흔이 훌쩍 넘은 노인이 얼굴을 구기며 무작정 고집을 피우면 진심 밉살스러워 보일 때가 많다. 엄마의 그러한 반응의 근본적 원인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엄마의 삶은 무엇인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그러니까 엄마는 공무원으로 치자면, ‘적극적 행정’은 고사하고 ‘부작위'에 능한 사람이다. 거기엔 아빠의 역할이 지대하다. 아빠가 살아있었던 시절, 엄마가 어떤 일을 하려 시도할 때 아빠와 갈등이 불거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갈등이라고 하기에는 아빠로부터의 일방적 강압 혹은 핍박에 가까웠지만.
그래서 어떻게든 엄마가 무엇인가를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나는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다.
문제는, 때때로 머리를 쥐어짜 찾아낸 나름의 효과적인 방법이란 게 대체로 한심한 결말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고심 끝에 얻어낸 대책들은 그저 시답잖은 잔소리에 불과했다.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면 난 엄마에게 잔소리를 별로 듣지 않고 자랐던 것 같다.
엄마의 잔소리에 불만을 토로하던 친구들을 보며 오히려 우리 엄마도 내게 잔소리란 걸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걸 보면.
사춘기 이후에는 활동적인 엄마를 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엄마의 제안으로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고, 쇼핑을 하고, 여행을 가는 그 모든 평범한 '모녀의 활동'들을 누리는 그들을.
아빠로 인해 일상이 온통 잠식되어 버렸던 엄마는 정작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가질 마음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리라.
어린 내 눈에 비친 엄마는 마치 로봇 같았다. 하루 24시간을 한 치의 오차나 빈틈없이 똑같은 패턴으로 유지하는 모습이.
주중의 엄마는, 회사에 다녀오면 핸드백을 방 한 구석에 던져 놓은 채, 매일같이 물걸레로 방바닥을 훔쳐냈다. 그러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나와 동생의 저녁을 챙긴 후,
아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멍한 듯 초조한 눈빛으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반쯤 감은 눈을 하고 고단한 몸을 방에 뉘었다.
주말의 엄마는, 거의 하루 온종일을 산송장처럼 방에 누운 채로 있었다. 마치 일주일치 잠을 한꺼번에 몰아 자려는 사람처럼. 목욕탕에 가는 한 시간 남짓을 제외하고는.
젊은 시절의 엄마는,
한창 글자 쓰기에 재미를 붙이던 어린 딸이, 따라 적을 글 한 줄만 적어달라며 떼를 쓸라치면 피곤한 목소리로 '다음에'란 말로 밀어내곤 했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 '다음'의 기회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하든, 무엇을 원하든 엄마의 관심이나 잔소리를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어린 나는 늘 엄마의 관심과 애정이 고팠다.
그런 엄마도 내게 폭풍 같은 잔소리로 강요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매주 일요일이면 마치 주말에 꼭 치러내야 하는 의식처럼 행하던 동네 대중탕에서의 목욕이었다. 엄마의 잔소리를 끌어내는 것이 하필이면 대중탕에서의 목욕이라니...
그때의 나는 그 사실이 너무 싫었고, 심지어는 이글이글 화가 치솟아 나오기까지 했다. 어린 내가 가장 싫어한 것 중에서도 최고봉에 있었던 게 바로 동네 대중탕에서 하던 목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이 그러하듯, 동생과 냉탕에서 즐기던 물놀이는 그 무엇보다 좋았다.
그렇지만 엄마는 동생과 내가 냉탕에 들어가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특히 때를 밀기 전에는, 결단코.
엄마는 우리가 온탕 안에 얌전히 들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온탕에 몸을 폭 담근 채, 열 손가락 마디 끝이 절인 배춧잎 끝처럼 쪼글쪼글해져 나이테 같은 것을 만들어낼 때까지 말이다.
그래야 엄마가 일주일 동안 우리 몸에 묵어있던 때를 만족스럽도록 시원하게, 살이 발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벗겨내 목욕탕비로 낸 몇 천 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므로.
나는 그 열기가, 쭈글쭈글 징그럽게 변해가던 내 손가락들이, 그리고 결정적으로 살갗이 타오르는 것처럼 사정없이 때를 밀어내던 그 순간들이 싫었다.
그래서 엄마가 목욕탕에 가자며 나를 부를라치면, 예닐곱 살의 짧고 앙증맞은 다리로 엄마가 쫓아오기 힘들 정도로 날렵하게 줄행랑을 치곤 했다. 인생을 통틀어 '뛰는 엄마'의 모습을 목격한 유일한 순간들이었다.
그렇게 잊을 만하면 나와 엄마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되어 동네 한 바퀴를 달음질쳤다. 그러다 결국 붙잡힌 나는 때로 엄마에게 매서운 꼬집힘을 당하곤 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엄마와 함께 대중탕을 갈 일도, 동네 한 바퀴를 달음질 칠 일도, 엄마에게 꼬집힘을 당할 일도 없다.
어른이 된 나는 목욕하는 시간을 즐기고, 뜨거운 탕 안에서 쪼글쪼글해진 내 손끝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음, 이제 제대로 (때를) 밀 수 있겠네.'라고 생각한다.
그 사이 아빠는 세상을 등졌고 우리도,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도 변했다.
그러나 엄마의 삶은 아빠가 세상을 뜬 지 수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오랜 세월 억압과 금지에 길들여진 피해자의 삶은 가해자가 사라진다고 해서 결코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일 테니. 부단한 노력을 동반하지 않는 이상 엄마는 남은 일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를 핑계로 이제 내가 엄마의 '잔소리꾼’을 자처한다.
그 옛날 동네 한 바퀴를 달음질칠 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 든 지금의 내가.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있으려고만 하는 엄마에게 앉아서 티브이라도 보라고,
앉아있는 엄마에게 일어나서 아파트 내 복도를 걸으라고,
복도를 걷는 엄마에게 아파트 단지 주변을 천천히 산책하며 햇볕을 쐬자고, 등을 떠민다.
엄마를 보면 이따금 태엽이 다 풀리기 직전의 오르골을 보는 것 같다. 마지막 남은 태엽의 한 바퀴를 근근이 버텨내며 움직이고 있는.
그럴 때면, 나는 음악이 스러지기 직전 오르골의 태엽을 잽싸게 다시 감는 마음으로 '잔소리 태엽'을 돌린다. ‘미운 일흔’의 엄마를 붙잡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