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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후루 Dec 02. 2015

컵 커피


사랑에 빠졌습니다. 누군가는 제 얘기를 듣고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저에겐 사랑입니다. 이렇다 할 연애를 해본 적 없는 제겐 설렘과 사랑은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는 출근길 지하철의 남자입니다. 저는 집이 홍제이고 직장이 명동에 있어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다 충무로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탑니다. 그는 경복궁역에서 제가 있는 열차 칸으로 들어섭니다. 그리고 제가 충무로역에서 먼저 내릴 때까지 저와 잠시 동행하지요.


저는 늘 사람이 제일 적은 맨 끝 칸에 타는데, 그도 아마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는 컵 커피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편의점 냉장 코너에서 볼 수 있는 달콤한 컵 커피 말이에요. 저도 가끔 먹긴 하지만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그는 단 걸 좋아하는 모양이지만 마른 체형입니다. 키도 꽤 큽니다. 남자 키는 잘 모르지만 아마 180은 넘을 것 같습니다. 하얀 피부에 인상이 단정합니다. 웃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예쁘게 웃을 것 같습니다.  


왜 그를 좋아하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화 한 번 나눠 본 적도 없고, 그저 지하철에서 마주치면 부끄럽고 볼이 뜨거워져 고개도 들지 못한 채 힐끔거리기만 할 뿐인걸요.


11월이라서, 곧 겨울이 오니까 외로워져서 그런 걸까요. 그냥 때 되면 밥 먹듯이 사랑할 때가 되어서 사랑에 빠진 걸까요.


저는 늘 이런 식입니다. 혼자 사랑에 빠지는 것이 특기인가 봅니다. 그런데도 스물일곱 살이 될 때까지 남자와 사귀어보지 못했습니다.


뭐가 그렇게 도도한지 소개팅 같은 부자연스러운 만남은 절대 사절입니다. 저에게 사랑은 서로가 마주 보고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 판 대전을 겨루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으면 사랑조차 숨 막혀서 멀리 도망갈 것 같습니다.


저의 사랑은 상대의 뒷모습에서 솟아나 옆모습에서 완성됩니다.


하. 정말이지 이런 생각이나 하니 지금까지 혼자인 거겠지요.


그는 주변 사람들과 달리 스마트폰을 보지도 않고, 빈자리에 앉으려고 호들갑을 떨지도 않습니다. 그저 늘 꼿꼿이 선체로 깊은 생각에 빠져있을 뿐입니다. 가끔 손에 든 컵 커피를 홀짝이면서요. 뭔가 여유로우면서 품위가 있습니다.


이십 대 후반이나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복장은 단정한 캐쥬얼 스타일입니다. 뭔가 자유로운 분야의 직업을 가진 것 같습니다. 옷차림도 제법 센스가 있어 보는 사람을 상쾌하게 합니다.


분명 여자친구가 있을 것 같지만, 제발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혹시 그도 저를 알까요. 저에게 호감이 있는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출근길에 자주 보이는 이상한 여자 정도로 기억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욕심이 생겨버렸습니다. 이대로 예쁘고 소중한 사랑을 마음속 오르골 상자에 고이 숨겨두면 좋았을 텐데.


그와 만나고 싶어졌습니다. 서로의 눈을 보며 전 그의 얘기를 듣고 그는 저의 얘기를 들어주길 바랐습니다.  

그동안 짝사랑은 몇 번 했었지만 이렇게 고백을 결심한 건 처음입니다.


고백할 생각만으로 저의 심장은 미칠 듯이 뛰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정말 지독한 사랑에 빠진 것만 같더군요. 인생에 다시 없을 그런 사랑 말이에요.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도저히 직접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아 저의 마음을 작은 편지지에 담기로 했습니다.

제 마음의 백만분의 일만 담았습니다. 혹시나 그가 부담스러워하면 안 되니까요. 그에게 전 그저 모르는 여자이니까요.


방문을 잠그고 몇 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전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안녕하세요. 많이 놀라셨죠? 지하철에서 자주 뵈었는데, 친해지고 싶어서 이렇게 용기를 냅니다.^^ 그리고 커피 늘 드시던 거 맞죠?^^ 제 연락처에요. 010-XXXX-XXXX'


네. 맞아요. 그가 좋아하는 컵 커피도 같이 전하려고요. 눈치채셨겠지만 '친해지고 싶어서'라는 표현에 공을 많이 들였답니다. 과하지 않게 저의 마음을 담고 싶어서요.


다음날, 컵 커피와 편지를 가방에 살포시 넣은 채로 지하철에 그가 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그는 늘 타던 시간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전 그의 시선을 피하며 스파이처럼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저의 계획은 이랬습니다. '내가 내릴 역에 도착하면 컵 커피와 편지를 전하고 후다닥 도망가는 거야.’


어지러울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볼은 빨개지고 지하철이 너무 갑갑하게 느껴져 빨리 내리고만 싶었습니다. 드디어 충무로역에 지하철이 섰을 때, 전 번개처럼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닌자처럼 나타난 저를 보고 조금 놀란 것 같았습니다. 전 망설임 없이 컵 커피와 편지를 그의 품에 밀어 넣고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지하철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잠시 플랫폼의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실패입니다. 그는 여자친구가 있다며 정중한 거절의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러면 그렇죠. 저의 욕심이 지나쳤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의 폰에 저의 전화번호가 새겨졌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조금 찌르르했습니다. 너무 스토커 같나요. 제가 생각해도 좀 무섭네요.


이제 지하철의 그 칸은 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시간에 저와 다섯 칸 떨어진 곳에서 그가 귀여운 컵 커피를 들고 출근 중인 모습을 상상합니다.


혹시라도 컵 커피를 홀짝일 때 저를 떠올릴까요.


더 바란다면, 아직 그의 폰에 제 번호가 새겨져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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