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작은 마을에서 한 달 살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장마철에 습한 남해는 익숙하지만 그래도 비가 내리는 것은 처음이라, 반가운 마음도 잠시 몸이 무거운 것에 감각이 집중된다. 어제 타이레놀을 먹고 진정된 줄 알았던 몸살 기운이 아직 남은 모양이다. 원래는 9시에 출근해서 같이 객실 수리 작업을 하기로 했는데, 다들 몸이 무거운지 10시로 미뤄졌다는 카톡이 왔다. 덕분에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게으르게 움직이며 회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라운지로 나오니 습도가 버겁긴 한지 낑깡이도 나무로 만든 작은 미니책상 위에 올라가서 앉아있다. 고양이도 사람처럼 이런 날씨엔 어디든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고 싶은가 보다.
오늘의 업무는 코부기 2호의 인테리어 개선 공사다. 코부기 2호는 거실 겸 부엌으로 쓰는 본채와 침실로 쓰는 별채가 구분되어 있는데, 별채에는 에어컨이 없어 여름에 본채에서 잠을 자야 하는 구조다. 그런데 본채 공간이 좁다 보니 잠을 자기 불편하여, 기존에 있던 이불장과 옷장 공간을 철거하고 공간을 넓혀보기로 했다. 지황 님, 건우 님과 함께 자작나무 합판으로 되어 있던 가구를 철거하고 면을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가구를 설치하던 당시에도 가변적인 공간 구성을 고려하여 목공풀 등을 붙이지 않고 작업했어서, 철거하기가 용이했다. 직접 수리를 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공간을 만들고 운영을 한다면 시간에 따라 바뀌는 여러 요소들을 직접 수선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목공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점심식사는 두모마을 사무장님이 쏜다! 최근에 큰 상을 받으셔서 마을 어르신들과 팜프라촌 식구들을 모두 초대해서 근방의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단다. 공사를 마치고, 청소 작업만 남겨둔 채로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비가 그쳐 있다. 부슬비를 맞고 다녔는지 촉촉해진 인절미가 평상 위에서 게으르게 눈을 반만 뜨고 있다. 함께 작업을 마친 지황, 건우 님과 같이 앉으니 세 명 사이에서 행복하게 길어지는 인절미다. 앞발은 건우 님의 작업복 바지를 향해 뻗고 엉덩이는 두들겨주는 내 손을 향해 있다. 행복한 고양이가 있는 마을에는 행복한 사람들이 산다.
식당에 도착하니 마을 어르신들도 차에서 내리고 계신다. 인사를 한 분 한 분 드리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두모마을에서 가깝고 음식이 맛있어 마을 회식을 하면 자주 찾는 장소란다. 오늘의 메뉴는 야채오리불고기다. 인심 좋은 사무장님이 많이들 드시라고, 부족하면 더 추가하라고 말씀해 주신다. 다들 축하하는 마음을 전하고 잘 먹겠다는 우렁찬 인사 후에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식사를 하는 와중에 다른 손님들이 들어올 때마다 마을 주민 분들과 인사를 나누는 게 아닌가! 다들 인싸 중에 인싸인가 보다, 하는데 유난히 더 반갑게 인사를 하는 분이 계신다. 친정이 두모마을이었던 분이라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란다. 어릴 때부터 작은 마을에서 자라 계속 근방에서 사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마음의 고향이 진짜 고향이고, 나의 인생 전부를 아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함께 사는 기분은? 안정감으로 가득할까, 답답함이 앞설까. 어르신들의 인생에 관심이 생기는 순간이다.
배부른 식사를 마치고 라운지로 돌아오고 나니 몸살 기운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다. 어제 먹은 타이레놀 기운이 떨어졌나 보다. 내가 먹은 타이레놀이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었어서, 읍내에 나갔다 오기로 했다. 한의원에 갔더니 온몸이 아픈 몸살에 왜 뜨끈한 목욕탕 가서 지지지 않고 여기에 왔냐는 말씀을 하신다. 옳으신 말씀이다. 침을 맞고,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 안마침대 위에 누워있다가 받은 탕약 세 봉 중 한 봉을 데워주셔서 마시고 나왔다. 원래 목욕탕을 갈 생각이 없었으니 당연히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다행히 나는 비누 하나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는 사람이다.
마트에서 비누 하나 달랑 사서 사우나에 들어갔다. 다섯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작은 온탕 하나와 덜 차가운 작은 냉탕, 얼음장같이 차가운 커다란 냉탕, 그리고 건식 사우나 하나가 있는, 아주 작은 동네 목욕탕이다. 다들 아시는 사이인지 오손도손 말씀을 나누고 계신다. 비누로 슥슥 샤워를 한 후에 어르신들 사이를 비집고 탕에 쪼그려 앉았다. 눈이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니 웃음으로 화답해 주신다. 뻐근한 뒷목을 물에 푹 담그니 살 것 같다. 어르신들은 날이 습하니 빨래가 도통 마를 생각을 안 한다는 얘기를 주고받고 계셨다. 남해에 오래오래 살아도 장마철 습기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온탕에서 사우나로, 사우나에서 작은 냉탕으로, 그리고 다시 온탕으로. 그렇게 두 바퀴를 돈 후에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가뿐한 몸으로 목욕탕에서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아직 이른 시간이다. 주말에 다녀갔던 친구가 내 자전거를 타고 두모마을을 한 바퀴 돌았던 게 생각났다. 나도 아직 끝까지 못 간 방파제를 끝까지 다녀왔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나도 두모마을을 좀 더 알고 싶어 졌었다. 해가 지기 전에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아기자기한 팜프라촌이 금산 자락을 뒤로하고 얌전히 앉아있는 모습을 본 후에, 팜프라촌을 등지고 바다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지난번에 달리기를 하러 들어갔던 마을 안길이 방파제 가는 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두모마을 앞에는 모래사장이 없어서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자갈로 된 해변도 물이 깨끗하고 아름다울 수 있구나! 물질을 하는 어르신들 몇 분이 해변에 계신다. 바다 너머로 큰 섬이 하나 보이는데, 유배문학의 산실로 불리는 노도다. 이곳에 <사씨남정기>, <구운몽> 등을 쓴 김만중이 유배되어 있었다. 노도에 들어가려면 벽련마을에서 배를 타야 하는데, 한 달 살기가 끝나기 전에 한번 들어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