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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Dec 18. 2023

여기에도 비는 옵니다

두보, 봄 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

나가서 비를 맞을 수는 없지만

내리는 비를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나가서 당신을 만날 수는 없지만

언제라도 당신을 그려볼 수는 있습니다.


비 오는 날 스님께서 사찰 연못에 비를 맞고 있는 연잎을 봅니다. 연잎에 빗방울들이 고입니다. 잠시 후 연잎이 기울어지며 고인 물들을 쪼르르 비워냅니다.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우는구나.”     


스님의 깨달음에는 이미 그렇게 볼 수 있는 마음의 시력을 갖고 있나 봅니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지금은 우리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알고 있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어느 때까지 얼마만큼을 버텨내고, 그 이상이 되면 또 얼마를 비워낼 수 있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겁니다.     


지금이 무거우면 기울여 보자고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비워내고, 내일은 감당할 만큼 버텨내고 힘에 겨우면 다시 기울여 비워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 해결 방안이 없을 때 ‘손 쓸 수가 없다’고 합니다. 손이 닿지 않으면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닿지 않고 잡을 수 없는 데에 손을 뻗으면 휘젓기만 할 뿐입니다.


휘저으면 혼탁해집니다. 

기다리면 혼탁했던 개울물도 맑아집니다. 


치우려고 비질을 하지만 먼지가 입니다. 

손 놓고 기다리면 먼지도 가라앉습니다.


철문이 굳게 닫혀있습니다. 

열고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갇혀 있다는 번뇌가 가라앉습니다. 

사방으로 둘러선 옥담은 내 키보다 훨씬 높습니다. 

고개만 들면 끝없는 푸른 하늘입니다. 


옥담은 갇힌 자들에게 풀린 날들을 바라보도록 둘러 서 있나 봅니다.     


두보의 시(詩), ‘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춘야희우 春夜喜雨)를 읽었습니다.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좋은 비 시절을 아는지

當春及發生(당춘급발생)

봄이 되어 내리니 모든 것을 피워내네

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바람 따라 살며시 밤에 들어와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만물을 적셔도 가늘어 소리도 없구나     


두보가 당대(唐代) 최대 내전이라던 안사의 난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떠돌던 어느 봄날, 어느 비 오는 밤에 지은 시라고 합니다.


봄과 비, 바람과 밤이 불가(佛家)의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면, “만물을 적셔도 가늘어 소리도 없”는 것을 바라보는 두보의 마음을 감옥에서 읽는 나는 나의 시절인연(時節因緣)을 헤아릴 길이 흐릿합니다.     


여기도 봄입니다.

안에도 밤에 비가 옵니다.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깨어

당신을 그리는 마음에

내리는 비는

가늘어

소리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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