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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May 15. 2024

‘모를 뿐’ 그리고 ‘드러남’

‘여행은 길이 끝나는 데서 시작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끝일 줄 알았는데 다시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갇혀 있어서 갈 곳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행이 걸어서만 가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길이 끝난 것 같은 감옥은 나의 새로운 여행의 시작입니다.


나의 기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나의 기도가 끝이 날 줄 알았습니다.

관성의 힘인지, 몸에 밴 습관인지 자려고 누워서도 일어나서도 기도하는 내 모습을 봅니다.

여전히 기도할 게 있습니다.

감사도 했습니다.


불교의 용어로는 다만 ‘모를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모두가 '알 수 없는 일' 때문입니다.

아픔을 치유하는 일은 '알 수 없는 일'로 고통을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모를 뿐'으로 받아들이는 길 뿐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임을 기독교인들이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 십자가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보혈 피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피조차 말라가는 마지막 숨까지 부르짖던 예수, 끝까지 외면하시는 하나님으로만 보였습니다.

예수의 외침과 하나님의 침묵, 그리고 '다 이루었다'는 예수의 끝말.

며칠간 밤과 새벽에 눈을 감고 뜨면 떠오르는 모습입니다.


여럿이 있는 좁은 방에서 혼자 돌아앉아 면벽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의 눈만 감고 말을 닫습니다.

다만 ‘모를 뿐’을 화두로 삼습니다.



새로 들어온 <손잡고 더불어>를 읽고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과 나눈 인터뷰 글 모음입니다.

선생님의 출소(1988.8.15) 이후인 1989년부터 고인이 되기 직전 해인 2015년까지 여러 곳에서 이루어졌던 대담 중에서 열 편을 선정한 것입니다.

20년의 감옥 생활보다 6년이나 더 길었던 감옥 밖에서의 26년간을 통해 그의 삶과 사상의 흐름을 따라가 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단지 세월의 비교는 아닙니다.

감옥 안에서와 밖에서의 선생님의 사색과 성찰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정제된 글로만 대했던 것과 여러 사람과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직설적이며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선생님 내면의 또 어떤 모습을 대할 수 있을지도 기대됩니다.


첫 인터뷰 대담 글은 1989년 1월에 이뤄졌던 것입니다.

출소 후 몇 개월 지나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옥 이야기가 많습니다.

처음 알게 된 것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1심 사형, 2심 사형을 받고 대법원 최종 판결(3심)까지 가서 원심을 파기해서 다시 고등법원으로 환송되었습니다.

그런데 파기 환송심에서도 구형은 사형이었고, 판결에서 무기로 선고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미결수 신분으로 '사형' 판결 속에서 1년 반 동안 살았습니다.

같은 사건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던 동료 세 명은 집행이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방에서 그리고 한방 건너서 사형 집행을 당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목격까지 했다고 합니다.


당시 나이 스물일곱의 청년이요, 대학 강사와 교관까지 지냈던 장례 촉망받던 그였습니다. 그때의 심경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신도 사형판결을 받고 1년 6개월 동안 지내면서 죽을 준비도 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나의 큰 그늘인 것이 맞습니다.

큰 위로와 다른 무엇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바로 서려는 의지의 힘을 줍니다.

선생님처럼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에 더해 선생님처럼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베낄 수도 배울 수도 없습니다.

오를 수 없는 큰 산으로 보입니다.

깎아지른 악산(岳山)이기보다는 품어주는 육산(肉山) 같습니다.

설악골 천화대 범봉보다는 지리산 반야봉의 모습입니다.


   

미결(未決)에서 기결(旣決)이 되었습니다.

미결이 끝이고 기결이 시작입니다.

끝이 부정이라면 시작은 긍정입니다.

그렇게 지나온 것처럼, 그렇게 지나가리라 봅니다.


물은 두 번 다시 같은 곳을 흐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처음이고 새롭습니다.

내가 물처럼 흐르려는 마음을 배우려는 연유입니다.

변화가 두렵지 않은 것은 새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날마다 새로움을 맞이할 준비를 하렵니다.

그렇게 흐르다 어느 굽이에서 당신을 처음으로 다시 새롭게 만나는 날이 앞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떠나지 않으면 맞이할 새로움이 없는 것이 여행길입니다.

‘오늘은 남은 생의 첫날이다’고 하니까요.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와 디오니소스 극장을 찾았던 선생님의 글에서는 당신과 함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앉아 멀리 에게해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내려와 소크라테스 감방을 찾습니다.

거기서 "창살을 잡고 감방을 한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20년을 감옥에 있다가 이제는 나와서 다른 이의 감옥을 밖에서 들여다보는 모습이 남 같지 않습니다.

내 모습을 그렸습니다.

당신을 마주했던 접견실 반대편에 앉아보는 겁니다.

출소 후 누군가를 찾아올 일을 만들어서라도 그 자리에 앉아보고 싶습니다.

감옥 밖에서 옥담을 끼고 돌아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그러고 싶다 해도 그런 날을 만들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은 연암의 둘째 아들(박종채)이, 아버지의 어린 시절부터 일상생활과 저술 등을 모아 엮고 쓴 책(과정록 過庭錄)입니다.

아들이 보고 들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글로 남겼으니, 읽는 내내 나와 아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독일에 괴테가, 중국에 소동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朴趾源)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터이다"라고 역자 박희병 교수는 말합니다.


나야 연암뿐 아니라 당대 한문으로 쓰인 문장의 기묘함을 알 수 없으니, 스스로 그를 평할 수는 없습니다.

구한말 유수한 문장가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연암을 평가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찬(贊)할 뿐입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그를 길러준 숙모가 연암의 손녀였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그의 문장은 천마(天馬)가 하늘을 나는 것 같아 굴레를 씌우지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법도에 다 들어맞는다. 그러므로 그의 문장은 문장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하며, 후생(後生)이 배워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溪聲便是廣長舌(계시변시광장설)

시냇물 소리는 크나큰 부처님의 설법이요

  

소동파는 간밤에 내린 계곡 물소리를 듣고 팔만사천법문을 듣는다고 노래했다고 합니다.

나는 좁은 화장실에 앉아 눈을 감고 줄을 당기면 지리의 아흔아홉 골 물소리를 듣습니다.

   

한 스님이 큰 스님(운문 雲門)께 물었답니다.
 
수조엽락시여하(樹凋葉落時如何)
나무가 마르고 잎이 다 떨어졌을 때는 어떻습니까?

운문 스님이 답합니다.

체로금풍(體露金風)
가을바람에 그대로 드러났노라.

 


불가에 전해오는 선문답입니다.


낙엽이 지고 나면 그다음이 무엇인가란 질문이 어린아이의 물음은 아닐 겁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앙상한 나뭇가지만 드러내는 겨울 나목(裸木)이라는 대답도 아닐 겁니다.

무엇이 드러난 것일까요?


내가 무슨 깨달음이 있어 답을 갖고 있어서 묻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쳐 주는 이가 없으니 혼자 생각하는 것이 당신에게 편지글이 됩니다.


본체(本體)가 드러났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 실체(實體)를 보여준 것 같지도 않습니다.

불가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삼라만상 모두 변한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나목(裸木)이 변하지 않는 본체와 실체는 아닐 겁니다.

결국, 나뭇잎이 돋아나고 또 떨어지는 그 변화가 바로 드러난 것이 됩니다.


변함없이 고정되어 달린 나뭇잎이 아니라 날마다 변하는 세상에서 나뭇잎도 떨어지는 바로 그 변화, 그 무상(無常)이 드러났다고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만 무상이 아니라, 봄에 새싹이 돋아남도 무상이 완전히 드러난 것이 될 겁니다.


미결에서 기결이 된 것 또한 무상이 완전히 드러남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나뭇잎 엽(葉) 한자가 재밌어 보입니다.

나무(木) 위에 풀(艸)이 달려 있습니다.

본래 풀이 나고 자리서 나무가 되는 것인데, 풀 위에 나무가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엽(葉) 자는 식물의 생장을 보여주려는 게 아닌가 봅니다.

그런데 그사이에 인간 세상(世)이 들어(葉) 있습니다.


인간사(人間事)가 새싹이 돋아 나무가 되는 성장의 순서에 있지 않습니다.

다 자란 나무가 꼭대기에 언제라도 떨굴 나뭇잎을 달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이 왕성한 푸른 녹음의 때인지, 이제 마지막 잎새인지는 저마다 자기의 때의 모습이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스스로 언제라도 무상의 ‘드러남’을 준비하는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나의 나뭇잎들을 다 떨구고 나면

그날은 그대로 ‘드러날’ 상(無常)의 날이 될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오늘은 다만 '모를 뿐'으로 보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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