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아이들을 데리고 탈의실로 입장할 때만 해도 조금은 흥분되어 있었다. 심장부근부터 발끝까지, 발을 동동 구르면 안 될 지경까지 이른 흥분감이 몸에 달라붙는 래시가드를 입은 내 모습마저 잊게 만들었다. 그렇다. 내 머릿속은 온통 선배로 차 있었다.
막 샤워를 하고 나온 선배의 모습은 어떨까. 수영복을 입은 모습은? 머리카락은 반곱슬일까? 항상 머리를 올리고 있었는데 이번엔 내렸겠지? 설마, 아이들이 있는데 딱 붙는 삼각이나 사각수영복을 입진 않았겠지?
입가에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조금 변태 같기도 했다. 들뜬 마음으로 아이들을 챙기고 나도 수영복으로 갈아입으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졌다. 터져버렸다. 왜 하필, 터지려면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대체 왜 하필 오늘이란 말인가.
"저, 선생님. 갑자기 생리가 터지는 바람에 저는 물속에 못 들어갈 것 같은데 어쩌죠?"
어린이집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처음엔 난감해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하아, 어쩔 수 없죠. 그러면 저 대신에 선생님이 물 무서워하는 친구들이랑 좀 놀아주세요. 발이나 손을 담그게 해서 친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돼요."
"네. 죄송합니다."
기운이 쫙 빠졌다. 흥분에 널뛰었던 심장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터덜터덜, 아이들이 놔두고 간 물건들을 챙기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비싼 돈 주고 산 래시가드도 오랜만에 물놀이한다고 큰맘 먹고 밀었던 다리털도 아침부터 공들여한 화장도 소용없게 되었다. 제일 아쉬웠던 건 점잖고 단정한 선배가 물속에서 아이들과 어떻게 노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자, 얘들아! 이제 나갈 거예요. 한 줄로 서서 천천히! 밖에서 구명조끼 입을 건데 장난치면 안 되겠죠? 보조선생님들이 도와주실 거니까 뛰지 말고, 알겠죠?"
물놀이에 신난 아이들의 힘찬 대답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실내 워터파크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 나는 뒤에서 이탈하거나 넘어지는 아이들이 없는지 살피며 비상약통이라든지 휴대전화, 확성기, 물, 수건 등 필요한 물품을 양손에 가득 챙겨 나갔다. 밖으로 나간 아이들은 서로 장난을 치며 즐거워했다. 난 한쪽 구석에 짐을 내려두고 아이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혔다. 잠시 뒤 남자탈의실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지훈 선배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자 담당 선생님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다그치듯 물었다.
"아, 선우가 갑자기 배 아프다고 해서 화장실 다녀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우가요? 선우야, 많이 아파? 이제 괜찮아?"
선생님의 걱정 어린 물음에도 공룡그림이 크게 그려진 수영복을 입은 선우는 선배의 다리를 흔들며 자기도 구경조끼를 달라고 징징거렸다. 선생님은 선우의 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조금 있다가 놀자고 타이르는 듯했다.
"우선 제가 선우 데리고 있을 테니까 보조선생님들은 아이들 구명조끼 잘 입었는지 확인해 주시고 이 근방에서 놀 수 있도록 해주세요."
"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순식간이었다. 난 물을 무서워한다는 아이들을 눈으로 좇았는데, 무서워한다는 말과는 다르게 각자의 방식대로 물을 즐겼다. 찰방찰방, 얕은 파도가 치는 풀에서 저들끼리 물을 묻히고 뿌리면서 꺄르륵 꺄르륵 웃어댔다. 난 그들의 곁으로 가 혹시나 있을 위험한 상황에 대비했다. 그러다 문득 야외 수영장으로 나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 짧은 시간에 아이들과 친해졌는지 선배의 팔과 다리에 아이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그 모습이 아빠 원숭이한테 매달린 아기 원숭이 같았다.
짐 챙기랴, 구명조끼 입히랴, 튀어 나가는 아이들 잡아오랴 정신이 없어서 선배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그의 뒷모습만으로도 앞모습이 어떨지 충분히 상상 가능했다.
혹시나 하는 나의 바람은 없었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 수영복에 흰색 민소매, 그 위에 입은 얇은 노란 비치웨어로 단정하고 점잖은 선배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그래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선배의 머리카락은 복슬복슬한 반곱슬이었다.
한쪽 눈으로는 선배를 다른 한쪽 눈으로는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그때 얌전히 앉아 다리만 파닥거리던 아이들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저희도 나가요."
"응? 나가고 싶어? 괜찮겠어?"
"네! 하은이도 나가고 싶대요."
제 짝꿍 손을 꼭 잡은 아이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발을 꼼지락거렸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야외 수영장으로 나간 상태였다. 나도 무료하던 참에 잘 됐다 싶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야외 수영장으로 나갔다. 실내 수영장과는 다르게 야외 수영장은 생동감이 넘쳤다. 커다란 양동이에서 쏟아지는 미니 폭포수에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내 손을 꼭 잡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무서워?"
"네."
다시 실내 수영장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아이들을 설득해 한쪽 구석에 있는 수중 놀이터로 향했다. 어린 아기들이 부모와 함께 놀만큼 얕고 안전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무서워해 내가 먼저 발목정도 되는 깊이의 물속으로 들어갔다.
"자! 이 정도는 괜찮지? 이제 선생님 손잡고 들어와 봐. 할 수 있어."
나는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었고, 아이들은 천천히 걸어와 내 손을 붙잡았다. 난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아이들의 눈을 보며 아기가 걸음마를 연습하듯 한걸음 한 걸음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느덧 아이들의 정강이까지 물이 차올랐고, 난 겁을 먹기 전에 물을 공중으로 뿌리며 그들의 용기를 칭찬했다.
"와! 우리 친구들 대단하다! 스스로 여기까지 들어왔어? 엄청 멋있는데?"
아이들은 정강이까지 오는 물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장구를 치며 나에게 안겼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안겨오는 바람에 그만 발이 미끄러지면서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아뿔싸. 생리대는 비상용으로 하나밖에 안 챙겨 왔는데, 물에 닿자마자 서둘러 일어섰지만 축축하게 젖어드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 상황과는 무관하게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나를 또다시 넘어뜨리려고 했다. 난 뒤로 물러서며 잔잔하게 물을 뿌려댔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아이들이 그걸 알리는 없었다.
"얘들아 해마가 물 뿜는 곳에 가볼까? 아니면 저기 비 내리는 우산 속으로 들어갈까?"
"네! 선생님도 같이 가요!"
앗! 이게 아닌데. 아이들은 내 양쪽 팔을 잡아끌었다. 아이들이 미끄러져 넘어질까 봐 뿌리칠 수도 없었다. 멈칫멈칫하며 조금씩 끌려들어 가고 있을 때 가까이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하은! 정하나! 물 무섭다더니 들어왔네? 같이 놀자!"
"응. 여기는 괜찮은 것 같아."
"와하하! 저거 봐봐. 해마가 침 뱉는다!"
"와, 진짜! 저기 가보자!"
아이들은 금세 하나가 되어 저들끼리 놀이시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난 한숨 돌리며 물밖으로 나와 느낌으로나마 상태를 확인했다. 축축하긴 했지만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가릴만한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수건으로 가리려다가 혹시나 혈이 새어 나와 묻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래시가드의 지퍼를 내렸다. 안에 수영복을 입고 있긴 하지만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수영복이라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때 바닥으로 큰 물줄기가 후드득 떨어지며 노란 옷 하나가 눈 안에 들어왔다. 선배의 비치웨어였다.
"이거 좀 가지고 있을래? 좀 더워서."
"... 네? 아, 네!"
"들고 있기 귀찮으면 입어도 돼. 애들은 내가 볼 테니까 좀 쉬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수중 놀이터로 뛰어들어가는 선배를 멍하게 쳐다봤다. '입어도 돼?' 선배 옷을 내가 입는다고? 손에 들린 노란 비치웨어로 시선을 내렸다. 잠시 고민하다 뒤돌아서서 래시가드는 허리에 묶고 선배가 준 옷은 위에 걸쳤다. 팔을 넣고 완전히 입기엔 좀 부끄러웠다.
선배는 아이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물속에서 열심히 놀았다. 분명 머리며 옷이며 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흐트러졌는데 그 어느 때보다 멋있어 보였다. 반곱슬의 머리카락은 말랐다 젖었다 반복하며 차분하게 내려앉았고 햇볕에 불그스름하게 익은 팔은 구릿빛 피부를 더 반짝이게 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개했다. 그리고 선배의 얼굴에는 화사한 빛이 내렸다.
"영화의 한 장면 같네. 진짜, 아름답다."
그 장면에는 멋있다, 잘생겼다는 말보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화창한 날씨 속에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선배 모습은 마치 슬로모션이 걸린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눈썹의 움직임, 팔 근육의 움직임, 입꼬리의 움직임, 그 속에서 나오는 다정하면서도 호탕한 목소리. 한순간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시간이 영원하길 바랄 만큼 황홀했다.
그 순간은 역시나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아이들을 서둘러 씻기고 옷을 입혀 탈의실 입구에 모였다. 난 열심히 빨아 탈수기에 돌린 선배의 옷을 들고 선배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뒤 남자탈의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선배가 나왔다.
"자, 다 나온 것 같으니까 한 줄로 서서 차에 타자. 선생님들은 짐 챙겨주시고요."
아차차, 아직 할 일이 남았구나. 선배 옷은 우선 가방에 걸쳐두고 남은 물과 간식, 비상용품들을 차에 실었다. 이상하게 올 때보다 갈 때 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참 아이러니였다.
"이제 복지관으로 출발할 거니까 안전벨트 하세요. 지훈 선생님, 한번 돌면서 확인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선배는 앞쪽부터 안전벨트를 확인하며 조금씩 다가왔다. 제일 뒤에 앉아 있던 나는 선배 옷을 꼭 쥐고 침을 꼴깍 삼켰다.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깜박하고 이제 드린다고 해야 할까, 옷은 세탁하고 드린다고 할까, 어떤 말을 해야 자연스럽게 들릴까. 무슨 말을 할지 정하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선배가 코앞에 와있었다.
"확인 다됐습니다."
"저, 저!"
마지막 아이까지 확인하고서 돌아서는 선배의 팔을 나도 모르게 붙잡았다. 선배는 뒤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선배 옷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잘 썼습니다."
머릿속에서 종이 댕- 울렸다. 잘 썼다니, 뭘? 그래 쓰긴 썼지. 젠장할. 그 많은 인사말 중에서 하필 생각하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가다니. 3초 간의 정적이 흘렀다. 선배도 당황스러웠는지 눈만 꿈벅꿈벅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마치고 시간 좀 내줘."
머릿속에서 울리던 종 주위로 개구쟁이 천사가 하나둘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