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사주기만 하면 해달라는 건 다 해주는 술버릇이 있던 그 시절의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연령 미상의 남자와 이태원 해밀턴호텔의 주차장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그 어두운 도시의 거리에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때문에 알 수 없는 누군가와 온 힘을 다해 혀를 섞었다"
칼럼 보면서 글에 반했던 작가 박상영님의 #대도시의사랑법. 몇 장 넘기기도 전에 첫 작품 ‘재희’의 저 대목에서 당황했어요. 내가 뭔가 놓쳤나, 앞 부분을 다시 들춰봤어요.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정보 없이, 오로지 글 잘쓰는 이의 화제소설이라는 것만 알고 시작했던 책읽기. 연령 미상의 알 수 없는 누군가와 키스를 하거나, 남자와 키스하는 주인공도 남자라거나, 이걸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기엔 저도 ‘고정관념’에 붙잡힌 포로였던 겁니다. 머리로는 열린척 해도, 쫌 놀라는 제게 쫌 놀랐어요.
그런데 이 남자의 사랑, 읽다보니 이보다 더 절절하고 처연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라는 우주’를 만나, 사랑을 하고, 그의 세계에 녹아버려 나를 잊고, 우주를 다 가진 듯 사랑하지만 절박하고 가련합니다. 사랑이 대체로 그렇죠.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라고 토로하는 주인공 영. 매번 지독하게 빠졌고, 매번 상처 뿐. 그리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소설은 연작이니까요. 사랑은 원래 그런거니까요.
7월에 김탁환쌤을 잠깐 뵙고, 이런 수다를 주절거렸던 얘기는 <가시리> 리뷰에 풀어놓았는데요
최근 박상영님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아주 기막히더라고요. 환희와 절망을 이어가는 절절한 사랑. 그런데 작년에 제가 꼽은 최고의 사랑소설이 <그해, 여름 손님>이었거든요. <콜미바이유어네임>의 원작 소설요. 둘 다 마침 남자들의 사랑이잖아요. 지난번에 제가 떠들었던 것 같은데, 요즘 사랑이란 건 인기 없는 단어라면서요. 사랑 우정 가족 같은 단어가 덜 쓰이고, 썸, 혼밥, 반려견 이런 단어가 더 많이 쓰인다고요. 그냥 이성의 사랑은 덜 절박하거나, 덜 미치거나. 그래서 미친 사랑 얘기는 다 퀴어인가.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퀴어의 사랑이든, 남녀의 사랑이든, 삼각관계든, 짝사랑이든, 외사랑이든, 부모자식의 사랑이든, 그냥 마음이 그렇게 미친듯이 달리는 것인데, 뭐 다르겠나 싶습니다.
7월 제주 여행에 들고갔다가 가는 비행기에서 절반 읽어버리고, 또다른 일행을 기다리는 카페에서 또 열심히 탐닉하고, 걸신들린 마냥 읽다가, 벌써 끝났네.. 했던 소설. 근사하게 리뷰를 남기고 싶었으나, 백수가 뭐 그리 바쁜지 시간을 놓치고. 이 '저장글'을 뒷북으로 보다가, 이쯤에서 풀어주자고 결심합니다. 언제 정리할지 모르겠어요ㅠ
다만 저는 박상영 작가님 인스타그램을 팔로잉하기 시작했고, 박 작가님 팟캐스트를 한 차례 챙겨듣고, 책과 닮은 자뻑 모드의 수다스러운 인간에게 빠졌습니다. 매력적인 작가님을 계속 쫓아다니기로 했어요. 사실 전작 자이툰(풀제목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라니.. 대체 감이 안와요.) 도 봐야 하는데, 북클럽을 세 개 씩이나 하면서 다른 책읽기에 허덕이는지라ㅎㅎ 언젠가 기회가 닿겠죠.
글맛이 좋은 작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몹시 솔직하고 격정적인 사랑 얘기에 반하는 겁니다. 사랑에 갈피를 잡지 못해 답답하거나, 사랑의 기억이 그리운 이들에게 좋은 책이랄까요. 매번 해도 매번 서툴고 낯선 설레임에다, 빠져들고 상처받고 회복되는 여정을 바보같이 반복하고, 행복해도 쓸쓸하고, 외로워도 어디에선가 위로받는, 인생 별거 있나 싶은 아련함에다, 주인공을 따라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갈라진채 헤매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인생의 웃고 우는 희극과 비극이 모두 결국 사랑. 내게 주어진 조건과 그의 조건 따위, 아무 의미도 없고 맥락도 없는 그런 사랑. 사소하게 스치면서 시작되는 인연이 결국 그 시간과 공간을 온통 삼켜버리는 사랑. 이 모든 사랑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인간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