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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일기 쓰는 아빠 Sep 10. 2020

가르치는 아빠와 배우는 아빠

윤리교육하는 아빠이긴 한데, 아직 서툴기만 하다 - Part II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우리는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종일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물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 알버트 아인슈타인



선율이 가 태어난 이후로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아이를 건강하게 성장시키기 위해서, 아빠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서 배워야 할게 아주 많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른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다.


자칫 잔소리를 듣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살아있는 육아 아카이브라는 생각이 좀처럼 하기 힘들다. 인공지능 시대의 양육 방식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시대와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로 관용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의 존재가 하찮은 어느 것쯤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선율 이를 생각하듯 처갓댁 부모님이 내 아내와 나를 기꺼이 여기실 텐데, 놀랍게도 난 그 마음에 대해선 얼마든지 차갑고 냉정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은 태양빛을 여러 갈래 색으로 나누는 프리즘 같다. 부모님의 뜻을 여러 갈래로 나누고 내가 보기 좋은 대로 정렬해 놓는다. 내 마음에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끝내 부모님의 뜻은 헤아리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낸다. 참고로 나는 처갓댁에서 꽤 오랫동안 얹혀 지내며 보살핌을 받았다.


그런데, 내 생각과 행동은 모두 감시당하고 있었다: 아들이 보고 있었다.


아이는 지금 위계질서에 대해 면밀하게 관찰하고 질서의 원리를 습득하는 중이다. 내가 부모님을 공경하는 대신에 험담하는 몇 마디 말 만으로도 아이의 정서는 혼돈에 휩싸이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내가 부모님께 감사 표현을 하면, 아들도 배울 것이다.

내가 부모님께 궁금증을 호소하면, 아들도 배울 것이다.

내가 부모님의 궁금증을 해소해드리면, 아들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부모님의 흉을 은밀하게 본다면, 아들은 그것도 배울 것이다.

나는 그게 가장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민 끝에 부모님에게서 부모가 되는 법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유일한 길이었다. 내 아들을 위해서도 그게 최선이었다. 그냥 마음만 다잡았을 뿐이다. 그랬더니 작은 변화가 우연처럼 일어났다.


장모님은, 평소에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우리와 함께 시청하는 것으로 낙을 삼으셨다. 그래서 선율이 에게도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기셨다. 하지만 나는 텔레비전 시청에 대한 관점이 매우 달랐다. 여기에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상 시청이 유아 발달을 방해한다는  연구결과에 대해 설명해 드리기도 했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엄마 아빠들이 끌고 가는 유모차 안에서 멍한 표정으로 태블릿에 시선을 빼앗긴 아이들에 관한 안타까운 생각도 나눠보았다. 부모님이 우리들을 키우시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시대라는 사실을 조근조근히 이야기해드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실 뿐이었다. 내 아내도 이것에 관해 실용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텔레비전을 대신할 만한 것을 소개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막상 떠오르질 않았다. 내 방식은 그저 아이와 함께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즐겁게 웃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 방식을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대안이랍시고 내어드릴 수는 없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부모님의 집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떠나오고 보니 부모님이 몸으로 만들어 주신 시원하고 편안한 그늘이 그리워 졌다.


그래서일까, 장모님이 요즘 생각을 달리 하셨다. 거두절미하고 텔레비전을 보여주시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일단 장난감으로 함께 놀자고 하신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내 마음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부모님의 방식에 대한 내 마음의 태도를 바꾼것 만으로도 눈에 띌 만한 변화를 경험한 셈이다. 어쩌면 늘 곁에 있던 선율이 와 우리 부부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 크게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와도 상관없이, 여러모로 감사드린다.


지금도 육아에 전념하면서 되뇌는 생각이 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선율이 에게는 내가 가장 중요하듯, 나에게도 부모님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부모님의 말씀이 잔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 할머니가 텔레비전을 보여주시는것을 못마땅하게만 생각했지, 곁에 앉아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내 말이 선율이 에게 잔소리가 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분들의 영향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내 관심을 환기시킬 만큼 화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고전적이고 오래 인내하는 나무 한그루가 드리워낸 그늘과 같아서 그렇다. 정작 나는 그분들의 시원한 그늘에 나무 책상을 펴고 앉아서 글을 쓰는 중이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불평을 가슴 가득 쌓아 올리곤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관한 생각으로 글을 시작해놓고는 그분들에 대해 한마디 언급할 자신이 없어졌다. 그분들의 영향력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관심을 환기시킬 만큼 화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고전적이고 오래 인내하는 나무 한그루가 드리워낸 시원한 그늘과 같아서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만들어 주신 그늘이 있어서 육아하는 아빠가 되기로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감사의 표현을 끼워 넣을 공간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들어서 감사의 말씀 올려드린다.


할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웃음을 지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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