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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Oct 30. 2024

가야 한다면 가자 한국

28. 세금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며

늦은 새벽에 들어온 것도 잊고 아침 일찍 잠이 깨졌다. 가느다란 실눈으로 창밖너머 고요한 마른 단풍나무를 바라보다 큰일이 난 것처럼 침대에서 벌떡 몸을 세웠다. 볼을 꼬집어봤다. 아프다. 랜딩은 확실히 한 거다. 랜딩 하며 있었던 일의 여파가 너무 강해 내가 영주권을 받았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방에서 나와 뒷마당이 보이는 베란다로 나갔다. 푸른빛을 잃은 채 이슬이 송골송골 맺힌 잔디 위로 안개가 지긋이 내린 차분한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다른 게 없었다.


영주권을 받는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는군..


"오늘부로 당신은 영주권자입니다."라는 심사관의 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5년짜리 비자를 받은 것뿐이었다. "이제부터 어디서든 일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내 심장을 더 간지럽혔다. 말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을 의미했다.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오후 쉬프트라 출근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일찍 집을 나섰다. 곧바로 차를 몰고 서비스 캐나다로 향했다. 사회보장번호를 빨리 바꾸고 싶었다. 22개월을 기다려 랜딩을 했는데 영주권 카드가 오기까지 한 달을 차마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다.


*서비스 캐나다(Service Canada): 사회보장번호를 비롯해 연방 정부와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는 기관
*사회보장번호(Social Insurance Number, SIN)는 개인에게 부여되는 9자리의 고유번호로 임시거주자는 숫자 '9'로, 영주권자는 '7'로 시작된다. SIN이 있어야 캐나다에서 일을 할 수 있고 세금 환급이나 실업급여 등의 정부혜택을 받을 수 있다.


줄이 길지 않아 곧 내 차례가 되었다. 국경검문소의 도장이 찍힌 랜딩 페이퍼를 보여주고 새로운 번호를 발급받았다. A4 용지에 찍혀있는 앞자리에 '7'이 붙은 사회보장번호를 보니 비로소 내가 영주권자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출근을 해 랜딩 소식을 알렸다. 엘리샤를 포함해 직원들 모두가 축하를 해줬다. 아찔했던 순간을 이야기할 때는 탄식이 나왔다. 무사히 영주권까지 안착하자 다음 타자인 주방 직원들은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뒤늦게 가게에 와 소식을 전해 들은 단 한 사람만 나의 '신분 변화'를 반기지 않고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블리야가 무슨 영주권을 받아. 우리한테 아무 연락도 없었는데." 사모님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이다.


이민부에서 고용주에게 연락할 일은 다. 고용주의 허락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이건 나의 영주권이고 영주권은 캐나다 정부에서 주는 거다. 나는 고용주에게 노동을 제공했고 가게가 이만큼 살아났으니 내가 할 일은 다했다.


"믿을 수가 있어야 믿지."


"증명해 봐. 블리야가 영주권을 받았다는 걸 증명해 봐."


영주권 받은 걸 증명하라니. 오전에 사회보장번호를 바꾼 덕분에 굳이 증명 같은 걸 할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번호를 알려주며, "급여처리는 이제 이걸로 해 주세요."

말이 없어진 사모님은 고개를 떨군 채 한참을 왔다 갔다 하더니 스케줄을 펼쳐두고 나의 마지막 근무일을 계산한다. 근무기간이 1년 이상 3년 이하에 해당하는 나는 법적으로 2주간의 노티스만 있으되기 때문에 나의 퇴직일은 그렇게 암묵적으로 정해졌다.


BC주 노티스(Notice) 규정: 근로자든 고용주든 퇴사통보를 할 때 고용을 유지해줘야 하는 기간이 있다. 3달 이상 근무 시 1주, 1년 이상 2주, 3년 이상은 3주다. 이후 연차가 늘어갈수록 1주일이 추가되며 최장 8주까지로 제한한다. 고용을 해지하는 주체가 고용주로 노티스 기간을 지킬 수 없는 경우, 그 기간에 해당하는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엘리샤가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블리야.. 정말 축하해! 나는 너무 서운해서 어쩌지? 그동안 블리야가 있어서 일도 재밌게 하많이 의지가 됐는데..."

"이제 밖에서 편하게 만나 얘기하."

"알겠어~ ! 주말에 훈제오리 세일한다는데 마트 같이 안 갈래? 에어프라이어에 해 먹으니까 진짜 맛있어."

"그럴까? 리암이랑 오랜만에 타이도 먹을까?"

"히히 좋아 좋아~"




 못지않게 나의 랜딩을 손꼽아 기다려온 사람이 있었다.

이주공사 대표였다.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몇 개의 케이스를 맡았다. 내 케이스는 아니었지만 급하게 마감날짜가 걸린 일들을 대표가 한 번씩 맡겨왔다. 주로 레터작업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맡겨봐도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자 나에게 두 시간을 주고 한번 맡겨본 게 처음 시작이었다. 시간 안에 레터를 써서 보내줬는데 대표가 바로 미팅룸에서 보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때부터 대표는 내가 풀타임으로 일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내비쳤고 랜딩 후 적극적으로 오퍼를 해왔다.


며칠 후 담당하던 케이스에서 고용주 관련 서류를 들여다보게 됐다. 서류를 챙기며 그 회사회계자료와 신청자의 급여내역을 보던 중 소득세가 눈에 들어왔다. 의문이 들었던 나의 세금이 떠올랐다. 대표에게 근로자와 고용주의 소득세율에 대해 물어봤다. 대표는 소득세를 계산할 수 있는 링크보내주며 세금에 의문이 있으면 회계사를 만나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보기 위해 한인타운에 있는 회계사와 약속을 잡고 급여명세서 몇 개를 챙겨갔다. 그동안 내가 받은 급여명세서는 빈약했다. 언니가 받는 거나 이주공사에서 본 명세서는 한 장짜리 양식이었던 것과 달리 내가 받는 건 한 줄짜리였다. A4 용지에 출력한 표에서 한 줄만 잘라낸 모양새였다. 그 한 줄 안에는 급여기간, 총액, 연금공제액, 실업급여공제액, 세금공제액, 팁, 그리고 실제 받는 실급여액이 차례로 숫자만 적혀있었다. 의문을 갖고 보니 이제야 내 급여명세서가 이상해 보였다.


일반적인 급여명세서


가져간 명세서를 보여주자 회계사도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세금 공제액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한다. 노동부를 통해 이의제기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이다. 노동부가 움직여 조사가 진행돼 기만이 사실로 드러나면 10만 불가량의 벌금과 영업정지를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무서운 말이었다.


우선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그날밤 영주권에 필요할지 몰라 모아두았던 급여명세서를 모두 꺼내었다. 날짜순으로 먼저 정리를 한 후 명세서에 있는 내역대로 표를 만들어 엑셀시트에 입력해 나갔다. 그리고 이주공사 대표가 알려준 링크에서 세금을 계산해 하나씩 표에 넣었다.

모든 입력을 마치고 그동안 내 급여에서 공제됐던 세금과 법적으로 내야 할 세금의 차액을 본 순간,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일었다. 도대체 어떤 명분으로, 어떤 기준으로  공제한 건지 모를 세금은 매번 다른 금액이었고 차액은 몇백 불, 몇천 불이 아니었다.


그대로 침대에 들어가 끙끙 앓아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동안 당했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심장이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가슴이 짓눌린 듯 답답해왔다. 공황장애를 준 것도 모자라 돈으로 장난까지 쳤다니. 아무리 가시 같은 말을 쏟아내도 천운까지 운운해 가며 재력자랑을 하던 사람들이 돈으로 장난을 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노동부문제를 제기하면 벌어질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조사가 들어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이 일로 내 영주권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까.

영업정지를 받으면 오늘도 그릴 앞에서 어깨가 빠지도록 요리를 하고 있는, 영주권까지 아직 갈길이 먼 주방 직원들은 또 어떻게 되는 건가.

모른 척 넘어가야 하나.

그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주방 직원들도 별일 없이 영주권을 받겠지.


모른 척 지나가고 나면 사는 내내 억울함이 나를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잘못된 일을 하는 사람눈감아비겁함과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가능성을 방치한 방임이 나를 괴롭힐 것이고, 네가 뭘 어쩌겠어? 하며 등 뒤에서 비웃는 두 부부의 모습이 그려져 화가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한 랜딩인데...


갈등이 이어졌다. 삼킬 수도 뱉어낼 수도 없는 가시가 목에 걸린 듯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꼬리를 물었고 수도 없이 반복됐다.


최악의 경우가 뭘까.

최악의 경우 그런 일도 있다는데, 조사가 들어와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영주권도 취소될 수 있을까?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그럴 수도 있을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컬리지에서 배운 노동법은 근로자의 이익을 우선했다.

피해자를 처벌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만약 재수가 없어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래, 그건 만약이다.


문득 이런 생각으로 식음을 전폐하며 사흘을 누워있는  자신이 말할 수 없이 한심해 보였. 유별난 랜딩을 우여곡절 끝에 받은 영주권도 부질없이 느껴졌다. 떠오르지도 못하는 바람 빠진 풍선을 쥐고 있는 마냥 맥이 빠졌. 다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그깟 벌어질지 모르는 일 따위를 두고 시름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가야 한다면 가자 한국. 여기서도 바닥부터 시작했는데 한국에서 다시 못할게 뭐 있어.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내가 할 일은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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