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풍국 블리야 May 29. 2024

뉴질랜드에서 캐나다로의 전학

06. 조카 전학시키기

그렇게 며칠을 끙끙 앓게 되고서도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 비자 문제도 해결해야 했지만 조카 학교 전학도 진행해야 했고 언니네가 비자를 받고 들어올 수 있게 하려면 할 일이 많았다.


뉴질랜드는 한국처럼 봄 학기에 학년이 시작되는데 캐나다는 가을에 시작한다. 당시 봄 학기 시작이 몇 달 남지 않았던 시점이라 그 시기를 놓치면 6개월을 더 기다려야 해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캐나다는 중학교, 고등학교 구분이 따로 없이 세컨데리스쿨 secondary school 이라고 부른다. 학년 grade 으로만 나누어지고 7학년부터 12학년까지 있다. 반면 뉴질랜드는 13학년 제다. 그러다 보니 어떤 학년으로 편입이 되는지 뉴질랜드에서의 학업이 어느 부분까지 인정되는지 등을 확인해야 했다.


조카의 결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본인이 다닐 학교이고 본인의 미래가 달린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결정을 밀어붙일 수는 없었. 조카는 뉴질랜드의 명문 공립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어린 나이에 혼자 그곳에 가서 한동안 방황의 시기를 겪다가 성적도 안정되고 마음도 안정이 됐는데 그 모든 걸 뒤로하고 캐나다에 와서 다시 시작한다는 게 너무 큰 두려움이었고 반갑지 않은 변화였다.




조카가 태어난 건 내가 대학에 다닐 때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캠퍼스에 놀러와 한 손에 풍선을 꼭 쥐고 걸어 다니던 기억, 말을 제법 하기 시작하면서 이모 발음을 잘 못해 '이오~'라고 부르며 전화통을 붙잡고 '이오~ 언뎨와아~?' 하던 기억, 집에 내려가면 손을 꼭 잡고 다니며 안 떨어지던 기억, 크면 이오랑 결혼한다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조카였다. 조카는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배웠다. 살이 찐 건 아닌데 골격이 또래에 비해 다부지고 뼈가 단단했다. 한 번씩 몸으로 장난을 걸어오면 너무 아파서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었다.


언니네는 조카가 애기 때부터 비즈니스를 했다. 그래서 조카는 유치원이 끝나고, 학교를 다니면서는 학교가 끝나고 우리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결혼을 늦게 하신 우리 아빠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보게 된 첫 손주와 몸싸움도 해주고 어린 손주에게 장기도 가르치셨다. '니가 물러라', '할아버지가 물러요~~' 티격태격 아이처럼 삐지기도 하며 찐 우정을 쌓아갔다. 그러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겨우 초등학생이었던 조카는 검은 상복을 입고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일일이 마주하고 앉아 베스트 프렌드를 잃은 상실감과 그 많던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나누었다. 너무 대견했다.


한 동네에서 줄곧 자란 조카는 친구도 많았고 내내 친구들을 리드하는 아이였다. 크게 부린 말썽이라면, 아마도 언니가 먹고 싶다는 걸 안 해줘서였던 것 같다. 학원도 빠지고 집을 나간 적이 있다. 마침 의견이 맞는 친구가 있어 둘이 가출을 결심하고 집에서 가방을 챙겨 나갔다. 친구집 앞에서 친구가 짐을 싸서 나오기를 기다리던 조카는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학원 선생님의 눈에 띄었고 가출소동은 그렇게 짧은 일탈로 끝이 났다. 그때 가방에 챙겨간 건 색종이, 가위, 풀, 손수건 등이었다. 심각해진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집 나가면서 챙겨간 물건들 얘기를 듣고 난 웃음이 빵 터졌다. 여전히 아이였다.


언니네 비즈니스가 한동안 고전하고 있을 때였다. 부산에서 유통업과 교육업을 하며 사업적으로 자리를 잡은 형부 동생의 권유로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고 조카가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졸업식을 앞둔 시기였다.


언니네는 부산에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조카는 중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조카가 점점 말수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시작됐나 보다 했다. 전화만 하면 재잘거리던 목소리도 점점 듣기가 어려워졌다. 어느 날 몸에 상처가 나서 집에 왔다. 괜찮다고 했다. 그러다 한번 언니가 찾을 게 있어서 낮에 집에 들렀는데 학교에 있어야 할 아이가 집에 있었다.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왔다고 한다. 그런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얼마 후 언니는 조카 방 침대 밑에서 찢어진 교복을 발견했다.


전주에서 부산으로 이사 간 조카는 동네 친구 하나 없이, 학교 친구 하나 없이 외지에서 왔다는 이유로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돼 있었다. 그 사실을 들킨 후 조카는 더 이상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 했다. 이런 고민을 지인에게 털어놓자 아는 분이 뉴질랜드에서 중고생 캠프를 하는데 방학 동안 만이라도 그곳에 보내 보는 건 어떻겠냐는 조언을 해왔다. 상담을 받고 언니에게 얘기를 했다. 조카를 어떻게든 예전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었다. 세상이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조카는 한 달간의 일정으로 뉴질랜드 캠프로 향했다.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조카는 그곳에 더 있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기간을 한 달 더 연장했다. 두 달이 다 되어서도 조카는 뉴질랜드에 남아있고 싶어 했다. 그곳에 체류하더라도 필요한 절차들이 있으니 우선 한국에 들어와서 정리를 해 보자고 조카를 설득했다. 그렇게 2달간의 캠프를 마치고 조카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언니네 비즈니스는 그때까지 자리가 잡히지 않았다. 계획에 없던 아이의 조기유학은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하던 일을 접고 아이와 같이 가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그대로 학교에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학교폭력 속으로 다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언니와 형부는 결국 아이를 뉴질랜드로 보내기로 했다.


막상 유학이 정해지자 조카는 망설였다. 가족들과 떨어져서 살 생각을 하니 어린 마음에 겁이 났을 거다. 그렇게 조카는 홀로 유학길에 올랐다. 한동안 방황이 있었다. 학교 수업을 빼먹기도 하고 혼자 어딘가를 배회하기도 했다. 당시 돌봐주시던 분이 교회에 데리고 가기 시작했고 조카는 신앙의 힘으로 그 방황의 시기를 견뎌냈다.




마침 내가 다녔던 컬리지에서 학생 관리를 담당하던 분이 웨스트 밴쿠버 West Vancouver 쪽 사립 세컨데리로 옮기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찾아갔다. 많은 이야기를 듣고 학교도 둘러봤다. 그 학교는 규모가 작은 이제 막 유학 생활을 시작한 학생들에게 적합한 학교였다. 그분은 놀스 밴쿠버 North Vancouver 에 있는 다른 사립학교를 제안해 주셨다. 학교는 다운타운 워터프런트역 Waterfront Station 에서 씨버스 seabus 를 타고 가지만 역에서 꽤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학교 분위기 등 여러 가지가 딱 마음에 차지 않았다. 어떻게든 공립학교여야 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씨버스 seabus


한국에 남아있던 학교 기록과 뉴질랜드에서의 전 학년 성적표를 놀스 밴쿠버 교육청 관계자에게 전달했다. 자료를 검토한 교육청은 이수한 대부분의 교과목이 인정받을 수 있는데 일부 과목은 캐나다에서 재수강할 것을 권했고, 당시 뉴질랜드에서 12학년까지 마친 조카에게 12학년으로 봄 학기에 시작해 그다음 해 봄에 졸업하는 것을 제안했다. 12학년 과정을 2학기 먼저 하고 1학기를 나중에 마치는 거다. 이곳 대학도 가을에 시작하는 일정이라 조카에겐 학교 졸업 후 6개월이 뜰 수도 있는 제안이었다. 반면 미리 봤던 사립학교들은 12학년 2학기만 마치면 졸업이 가능했다.


조카는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예상대로 사립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대로 뉴질랜드에 있으면 1년 후 대학에 갈 수 있는데 캐나다로 와서 1년 6개월 후 대학 진학이 되는 상황이 고민이 됐을 것이다. 뭔가를 빨리 이루고 싶은 어린 마음에 6개월이라는 시간 차이는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교육청에 몇 개의 공립학교를 추천해 줬다. 선택권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중 어느 학교가 제일 낫다는 걸 설득하기 위해 몇 개의 학교를 더 보내온 거다. 학교를 둘러보니 추천해  곳이 역시 제일 괜찮아 보였다. 규모도 크고 운동장이며, 교실이며, 보조 수업 공간, 체육시설, 그리고 카페테리아 등도 잘 되어 있었고 학생들의 수준도 제일 나은 곳이라고 했다. 그렇게 조카는 학교를 결정하고 봄학기 시작 전 캐나다에 오기로 했다.


놀스밴쿠버 세컨데리스쿨


학교를 정하고 입학 절차를 진행하다 보니 '가디언' 문제가 생겼다. 만 19세가 되지 않았던 조카는 학생 비자를 받기 위해 가디언이 필요했다. 나는 가디언 자격요건이 안 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찾아야 했다. 아는 인맥도 많지 않은 데다 해당 미성년자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책임이 주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선뜻해준다는 분을 찾기가 어려웠다.


*가디언 제도
미성년 아이들이 법적으로 캐나다에 일정기간 학업을 목적으로 체류할 수 있도록 자격요건을 부여하는 제도로 비자를 진행할 때 가디언 서류가 요구된다. 가디언은 캐나다 영주권자 또는 시민권자 성인으로 친인척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밴쿠버가 있는 BC주는 만 19세, 토론토가 있는 온타리오주는 만 18세까지 가디언이 필요하다.


그때 교육청 관계자를 통해 비영리재단을 소개받았다. 다행히도 마음 좋은 분과 연결되어 가디언 문제가 해결됐다. 그리고 이내 캐내디언 가정에서의 홈스테이도 정해졌다. 모든 게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