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게 해주오
오늘은 요가를 안 갔는데, 왜냐하면 문데이(moon day: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요기(니)들이 수련을 쉰다. 지난 주엔 퇴근이 늦어서(월), 저녁을 많이 먹어서(화), 머릿속이 복잡해서(수), 목요일엔... 갔고(정작 이 날이 심적으론 가장 복잡한 날이었다), 저녁 약속이 있어서(금), 전 날 술을 먹어서(토)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어가며 빠졌다. 이번 주는 새로운 마음으로 수련을 잘 나가려고 했는데, 오늘 퇴근해서 나오자마자 수퍼문인가 싶을 정도로 커다란 보름달과 마주했다. 오늘은 공교롭게도 보름달이 떴으니, 어쩔수 없이 못 가는 거야. 동시에 요가 빼먹을 그럴싸한 이유를 찾아 내심 안도가 되는 거였다.
일상의 단조로움이 클라이막스에 올랐던 지난 여름엔 요가와 피아노에 중독되었더랬다. 대단히 수련이 깊은 요기니도 아니고 피아노도 그저 취미 수준이지만, '너 욕심 많다' 소리 들으며 여름 내내 요가와 피아노에 빠져 살았다. 매트 위로 뚝뚝 떨어지는 땀과 수련 후 달콤한 사바아사나가 주는 카타르시스에 빠져 여름 내내 아쉬탕가 수련만 했다. 12년만에 다시 치게 된 피아노는 초반 적응기에 꽤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좋아하는 곡을 내 손으로 연주하는 기쁨은 굳은 손이 주는 스트레스를 상쇄했던 것 같다. 모든 창조적인 행위와는 거리가 한 참 먼 8년차 직장인에게 조그마한 창조의 경험을 안겨준 것이 가장 컸고.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격하게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가을이 되어 요가하기 더할나위 없이 좋은 날씨가 되었는데도 아쉬탕가를 피해 릴랙세이션 수업만 찾아 들어가다가, 심지어 이제는 갖은 핑계를 대며 수련을 빠지고 있다.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매일 피아노앞으로 이끌던 에너지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연주가 마음대로 안된다는 스트레스만 남아 연습에 게을러졌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재능없음만 확인하는 것 같아서,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어차피 취미로 하는 건데.) 연습실 벽 너머로 들리는 다른 사람의 Chopin Ballade 1번 연주(나는 역량이 부족해 도전 못하는 곡) 소리에 우울해지기도 하고. 무던한 하루하루가 클라이막스(轉)를 찍고 내려가면서 차고 넘치던 에너지마저 소진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권태가 결(結)의 스테이지에 온 것이라면. 어쨌거나 삶의 새로운 국면 앞에 서 있음이 분명하다. 다행히 피아노에 대한 감정은 지난주 이후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지난 주 레슨에서 감정 표현이 좋다는 피드백을 들었는데 아주 힘이 됐다. 어제 조성진의 연주(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를 보고 와서 또 많은 감동과 힘을 얻었다. 맑고 깊은 연주와 풍부한 감정 표현, 자신감있고 여유있는 애티튜드. 정말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앙코르로 들려준 쇼팽 녹턴 9-2는 특히 많은 울림을 주어 더 감사했다. 어제의 공연이 도약의 기로에 있는 내게 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면, 클리셰인가?
다시 취하게 해주오. 공허를 채우기 위한 중독이 아닌, 삶을 일구어 내는 에너지로서 쭉 취해있도록 해주오. 취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회복하기를. 잘하는 자이기 보다는 즐기는 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번 주 요가 수련을 다시 시작해야지. 미루어 둔 피아노도.
20191111月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 밤 카시스 와인과 한 잔과 함께 키보드를 두들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