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쓸쓸한 사람이 있다. 필립 말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이 사내가 이렇게 말할 때는 더더욱. '이별을 할 때마다 조금씩 죽어 가네'. 다시 무지개를 보았다. 갑자기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무지개. 작별의 말은 없었다.
2022.6.6 비가 온 줄도 몰랐는데 히늘에 나타난 무지개.
돌아보면 영화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추리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슴이 두근거려 못 견디기 때문이다. 긴장을 오래 버티지 못해서 공포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는다.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하고, 좀비물 같은 것도 못 본다. 어릴 때 제일 무서웠던 것 중 하나가 해마다 TV에 나오던 납량 특집이었다. 압권은 시골집 마당에서 보았던 <전설의 고향-구미호 편>(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전설의 그 장면!) 청소년기였던가. 영화관에서 단체 관람으로 본 <13일의 금요일>도 트라우마가 된 영화 중 하나다. 왜 그런 영화를 만들고 좋아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 중 하나다.
얼마 전 넷플릭스를 가입하고 아이와 함께공유가 주연이던 <고요의 바다>도 두세 번 보다가 포기했다.장안의 화제였던 학교 좀비물 <지금 우리 학교는>은 첫 회를 보다가 철수. 조선의 좀비물 <킹덤>에는아예 덤빌생각조차안 한다. 그뿐인가. 유월과 칠월사이에 열리는 뮌헨 영화제에온 이창동 감독의 <버닝>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아직보류 중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오징어 게임>은 말해 무엇하랴. 자랑이라는 말이 아니다. 정서적 결함이 크다는 뜻이다. 희로애락 등 일반적인삶의 충격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시스템에오류가생길우려가적지않기때문.
주말 동안 쉬지도 않고 <기나긴 이별>을 끝냈다. 600 페이지에 육박하는데도 지루하다는 생각을 못했다. 도대체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분간이 안 가는 사립탐정 필립 말로라는 이 사내는 어떻게 되는 건지. 저러다 진짜로 크게 다치는 건 아닌지. 설마 죽기야하려고, 주인공인데? 그 믿음 하나로 끝까지 갔다. 사람 간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 말로라는 주인공남자와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작가 둘 다. 그 사내가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정신없이 흔들릴 때. 그때조차 사립탐정다운 면모를보일 때(그래서 소설이긴 하지만). 마지막의 빛나는 반전까지. 더는 말할 수 없고,말하지않으려 한다. 직접 읽어보시길. 후회는없으실 듯. 이렇게 생생한 캐릭터와마음에착착 감기는심리 묘사라면.
빅투알리엔 마켓의 <카페 이탈리> 에서 발견한 멋진 여행 가이드북. <Wien for Women only>. 뮌헨/함부르크/베를린/취리히 편도 있다. 카푸치노와 크루아상은 덤.
다시 무지개를 보았다. 무지개를 본 게 얼마 만인지. 봤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건가.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무지개는 2020년도다. 알바도열심히 하고 건강도 좋을 때였다. 대신 일하며 받는 스트레스가무지막지했다. 그해 초여름. 새벽일터를 오가다 얼마나 자주 무지개를 봤던가. 그것도 쌍무지개를! 그 무지개의 끝이 암이었다니 허탈하다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시간들을 무사히 지나왔으니 무지개 덕이라우겨도 말이 되겠고. 수술과 전이와 항암을 지나 2022년여름을 앞두고 다시 무지개를 보았다. 아이의 핑스턴 방학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2주 동안 뭘 하지? 고민 끝에 남편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인사흘을이용해빈으로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책꽂이에서 빈 관련 여행 책자를 찾아보니마침 노시내의 <빈을 소개합니다>(출판사 마티)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을 쓸 때 저자는 빈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여행자가 알기 힘든 빈의 구석구석을 보여주려 애쓴 노력이 보인다. 빈의 어제와 오늘도. 빈이 초행길인 경우에는 내용이 좀 심오한 편이다. 나의 여행법은 소박하다. 여행에소질이 없어 일단 책부터 본다. 호텔은 남편이 고른 곳으로 예약. 나 역시 호텔을검색해 봤는데 거기서 거기고 피곤하기만했다.아이와둘이여행을갈 때는 조금 비싸더라도 시내 중심의 호텔을 고집할생각이다. 번화가를 걸어서 다니다가 언제라도 돌아와 쉴 수 있도록. 이번 목표는 클림트나 에곤 쉴레나 훈데르트 바서의 그림만몇 개 보고올 생각이다. 집을 떠나 남편과 나도 잠시머리를 식히고 아이에게도 다른 도시를보여주는 의미에서 떠나는가벼운 여행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