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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솔 Nov 26. 2024

양극성과 통일성 이해하기 4

도전 4.

(지난 화에서 이어집니다...)


  인간은 의식이라는 한계 때문에 '존재'라는 동시성을 한쪽 극씩 볼 수밖에 없는 연속성으로 우회하여 알 수밖에 없다. 통으로 볼 수 없으니, 하나씩 살펴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시간'이 생겨난다. 우리가 차례차례 알아보는 사실도 결국 동일한 존재, 동일한 현실의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통일성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양극으로 나누어진다. 양극은 서로 보완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존재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대극을 필요로 한다. 양극성은 통일성의 양쪽 모습을 동시에 살펴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씩 순서대로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그렇게 해서 '리듬', '시간' 그리고 '공간'이라는 현상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양극적인 의식이 통일성이라는 것을 언어로 설명하려면, 이것은 역설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양극성이 가져다준 장점은 인식능력이다. 인식능력은 양극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양극적인 의식의 궁극적인 목표는 시간으로 말미암아 온전하지 못하게 된 자신의 상태를 극복하고 다시 결함이 없게, 즉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ㅡ몸은 알고 있다, 뤼디거 달케.

 

  뤼디거 달케는 『몸은 알고 있다』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갈등과 질병의 관계를 서술하기 위한 핵심적인 이론적 가설로써 양극성과 통일성을 설명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의도 그 이상의 것을 느꼈다. 현대의학에 익숙한 나로서는 파격적인 이론적 가설들을 접하는 내내 확신에 찬 작가의 문채에 사로잡혀 휘몰아치듯 책을 읽었다. 내용이 어려워 다시 돌아가 읽고 싶은 마음은 이 책의 매력에 빠져 잘 이해해 보고자 하는 내 마음이 담겨있기도 했다. 과학적이거나 현대적인 것으로 이 책을 맞이하고 대하기보다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읽고 있노라면, 내 영감과 직관의 지평이 넓게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과학적인 것만이 믿을만한 것이라고 정해 놓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 과학적인 것이 왜 당연한 기준이 될까? 어디까지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학적인 것의 근거는 과학적일까?


  '있는 그대로 존재함'이 만물을 이루고 우주가 있는 것이라면, 그 적절함을 어떻게 찾아가야 할까? 어쩌면 같은 것을 추구하면서 형태를 다르게 보고 싸우는 것은 아닐까?


  나는 당연히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악惡'과 같은 극들에 대해서 맹목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나의 지나온 삶에서 시간을 제거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어떤 패턴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하나의 점으로 수렴될까?



  양극성과 통일성을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상상하고 있으면, 거시적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새롭게 맞이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만물이 그 자체로서, 또 서로서로 그 존재의 기반을 의지하며 우주로써 존재하는 듯 상상이 이어진다. 그리고 겸손해진다. 배움은 매번 나를 겸손하게 하는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인식의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했음을 되돌아봤다. 내가 얼마나 통일성을, 동시성을, "하나"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되돌아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생각이 합리적인 것 같은 때에도 얼마나 불온전한 생각일 수 있는지를 바라보게 했다. 내. 가. 틀. 릴. 수. 도. 있. 다. 는 말이 새삼 다시 떠올랐다. 다시 또 편협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끊임없이 인식하고 싶다. 나란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 약하고 강한, 작고 큰 내가 되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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