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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riaMJ Mar 25. 2021

자연스럽게

풀샷과 타이트샷

산이의 유치원 등원 버스는 9:08에 우리 아파트 단지 편의점 앞에 오는데, 

서두르다 뽀뽀도 못하고 인사도 못하고 가는게 싫어서 집에서 항상 10분 전에 나온다. 

걸어서 1분 거리인데. 


가다가 탈것 덕후인 아들이랑 여러 차도 구경하고, 매일 똑같은 시간에 지나가는 

고소 작업차도 보고 비슷한 모양과 똑같은 노란색의 다른 유치원 버스를 보며 아침 9시에는 

등원해야 하는 것이 이 땅의 5살들의 평범한 일상임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마스크 내리면 큰일나는 줄 아는 우리 아들에게 괜찮다고 하며 아뽀(아침뽀뽀)를 하고 

아들이 창피할만큼 요란하게 손을 흔들고 "잘 갔다와"를 외치는 것이 모닝루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어제 있었던 일이다. 자꾸 유치원 버스가 9:08이 아니라, 5분이나 6분쯤에 와서 바로 출발하는 게 불만이었던 나는 바로 유치원에 얘기를 했고 원장님은 앞으로는 정시에 출발할 수 있게 말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월화는 문제가 없었는데 어제는 또 9:06쯤 됐는데 막 버스가 가려는 것처럼 스믈스믈 움직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순간 나는 "아니! 왜 또 이렇게 빨리 가고 그러세요?" 라고 외쳤다. 1초의 정적. 


띠로리. 근데 유치원 버스는 출발하는 게 아니라, 뒤에 들어오려고 하는 다른 승용차를 피해 조금 앞으로 땡겨준 것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버럭 한 것이 너무 창피했고, 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바로 이해가 되는 쉬운 상황이었는데 버스 좌석에 앉은 산이한테만 꽂혀 있어 미처 상황 파악을 못한 내가 우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출근길에 이런 생각을 했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어떤 에티튜드란 것은 어려운 거구나. 

일을 할때도 프로세스의 모든 부분에서 허세가 아니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오래 생각하고 고민해서 막상 현장에 가면 스태프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출연자들에게 정확한 얘기만 하며, 

어떤 돌발상황에도 여유있게 대처하는. 그렇게 되도록 촬영 전이면 굉장히 여러 상황들을 계획하곤 하는데 

경륜에서 오는 자연스러움까진 아직 내게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키움에 있어서도, 등원을 하고 어디를 가고 새로운 상황 속에 아이와 놓였을 때 자연스럽게 대처하는 것은 보기엔 '원래 저 사람은 성격이 느긋한가' 하겠지만 엄청난 내공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버스에 탄

자기 아이만 전전긍긍 하며 보는게 아니라 버스 전체를 보고, 뒤에 뛰어 오고 있는 다른 친구도 보고 그렇게 한 걸음 떨어져서 풀샷으로 상황을 볼 수 있는 여유. 아직은 나한테 부족한 것. 시선을 타이트하게도 봤다 풀샷으로도 봤다 하며 자연스럽고 넓은 시야를 가져야겠다. 매사에. 


그럴 때 문득 떠오른 대사가 하나 있는데, 내 최애 드라마 중 하나인 미생 속 대사. 

오과장이 옛 선배에게 장그래를 두고 하는 말 

"애는 쓰는데 자연스럽고 열정적인데 무리가 없어"


애를 쓰고 열정적이면서도 자연스럽고 무리가 없는(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그런 태도. 

가져 보겠노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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