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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 May 21. 2018

강남역 사건 그 이후 2년...

페미니즘 공부 2년차 한국 남자의 회고

지금 내 정체성을 이루는 부분 중에 가장 뜨거운 정체성이 무얼까 하면 바로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이다. 항상 무지에서 비롯된 자신감에 가득 찼던 나는 군생활을 겪고 나서 지대한 정체성과 성격의 변화를 겪게 되고 어떤 일이 닥칠지 전혀 모른 채 16년도를 맞았다. 평온한 기계적 중립 한남의 길을 가던 중에 바로 강남역 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건 처음에는 여느 남성들과 다름없이 비교적 신중한 자세를 취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사건의 충격성을 인지하지 못하던 멍청한 나는 여동생에게 물어봤다. "강남역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답이 돌아오는 시간은 찰나였다.

"무슨 생각은 생각이야, 내가 거기 있었으면 죽었잖아."


이 한마디에 나의 오만한 중립은 와장창 부서졌다. 그리고 이 말은 여전히 내 머릿속을 맴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어떤 여성이 거기 있었더라도 죽었을 사회다. 그 뒤로 나는 그 어떤 논리도, 미디어를 가득 메우는 근거나 주장도 들리지 않았다. 나의 충격적 발견은, 같은 사건인데 단지 성별의 차이로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고 어느 쪽이 권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는 명백했다는 발견이다. 운이 좋게도 친구 중에 당시 격정적으로 분노하던 친구가 있었고 그 덕에 페미니즘이라는 언어를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못생겼는지 대단한 페미니스트 선언을 해야지 라던지 따위의 거창한 시작은 아니었다. 그냥,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고 책 읽으면서 조금씩 알아가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당시 메갈리아의 탄생에 이목이 집중되던 시기였고 그 이름에 영향을 준 책 '이갈리아의 딸들'을 첫 번째 책으로 읽어야지 싶었다. 지금 와서 보면 이렇게 패기로울 수가 없다. 책을 읽는 데는 무려 2달이 넘게 걸렸다. 책을 읽으면서 3장이 넘어가면 온갖 잡생각과 자기혐오,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마음속에 치솟아 더 읽지 못했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책을 다 읽어야겠다는 의지로 강남역 사건 이후 여름을 '이갈리아의 딸들'과 보냈다. 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나의 세계는 완전히 흔들렸다. 그 뒤로 책의 방식과 같이 모든 문장의 주어를 여성으로 바꿔보았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꿔봤을 때, 말이 안 되는 말은 듣지 않거나 반박하고 따지고 묻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박근혜 게이트가 터졌고 이제 막 페미니즘이 무얼까? 하던 차에 국가와 정치라는 개념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촛불과 페미니즘

이제 막 페미니즘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나에게 박근혜와 최순실을 조롱하는 수없는 성차별적인 사람들을 발견했다. 광장으로 시위를 나가고 권력이 가려놓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대통령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마주한 촛불시위에서 오히려 나는 한국 사회의 성차별적인 문화를 더 선명하게 느꼈고 운이 좋게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다시 나의 페미니즘 공부로 돌아가자면 책을 두세 권 더 읽었고 이제 페이스북 상에서도 성차별적인 사람들에게 비판하는 댓글을 막 달기 시작했다. 계속 듣고 고민할수록 나를 괴롭히던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섹슈얼리티에 관한 문제였다. 여전히 많은 남성들은 '야동 안 보는 남자가 어딨냐?'라는 명제로 연대했고 나는 쉽사리 문제제기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람하는 불법 촬영 영상과 여성혐오적인 시선, 폭력이 가득한 야동을 끊는다는 일은 섹스를 대하는 나의 태도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학습된 남성성에 큰 저항을 받았다. 고민을 그냥 미뤄버렸고 여전히 나는 야동 소비자에 머물렀다. 


남자다운 게 뭐야?

그다음으로 부딪친 고민은 바로 '남성성'에 관한 것이었다. 잘 생각해 봤더니 나의 옷 입는 취향이나 삶이 얼마나 '남자다움'에 종속되어 있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맨 박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내가 형형색색의 옷을 입으면 남자애가 취향이 특이하다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사람들. 온갖 매체에서 '상남자'로 소비되는 남성성. '남자라면 ~ 해야지'에 들어가는 모든 말. 페미니즘은 나의 수많은 차별적 언행과 생각을 반성하는 것을 넘어서 내 문제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었다. 나는 적극적으로 맨박스를 해체하기로 마음먹었다. 해체를 하고 나면 정말 남자다운 게 뭐일까 알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또한 맨박스를 깨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차별을 그냥 '남의 일'처럼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2017년은 그런 관점에서 여러 실험을 했다. 치마를 일상복으로 입기와 화장을 배우는 일이다. 



치마와 화장

치마를 입는 일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했다. 사람들은 남성으로 추정되는 나의 모습과 치마를 입은 나의 모습이 공존하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놀라면서 두세 번 아래 위로 훑어보는 일은 기본이고 가끔 화장도 같이 하고 나간 날은 날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랬다. 우리 사회는 동성애 혐오 사회였다. 그 뒤로 더 감각이 예민해진 나는 사람들이 수시로 동성애 혐오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방송에서 남성과 남성의 사랑을 농담 삼는 것은 예사고 주변이 그냥 대놓고 '나는 동성애자가 너무너무 싫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빨간 티셔츠가 싫다는 그 '싫음'이 아니고 실제적인 혐오가 포함된 싫음이었다. 이어서 배우기 시작한 화장은 더욱 끔찍했다. 꾸미는 대상으로서 여성을 완전히 타자화해오던 나에게 화장을 연습하고 화장품을 공부하고 그것을 실제로 하고 밖에 나와서 지우는 일까지의 과정은 어마어마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휴학생이 아니었으면 정말 시도도 못했을 것 같다. 화장에 대해서 평가하는 일은 정말 정말 무례한 일이고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끊임없는 꾸밈노동을 강요한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정말로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 또, 화장품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사는 일은 엄청난 시간적, 물질적 비용이기도 하다는 사실. 여성을 덜 타자화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맨박스를 깰 수 있었던 소중한 실험이었다. 이제 나는 기분 내키면 치마 입고 기분 내키면 화장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으로써 옷과 화장은 정말 좋은 도구다. 그 누구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


여성과 노동

'잠깐 애덤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읽으면서 여성의 노동에 대해서 계속 고민했다. 자본주의는 재생산 노동을 여성의 역할로 특정지우고 착취한다. 요리, 청소, 빨래, 분리수거. 이런 노동은 끝이 없다. 자본주의 가치관에서 이런 노동은 계속해서 대단히 실력이 느는 노동도 아니고 반복적인 일, 그러니까 돈이 안 되는 일이다. 돈을 많이 벌면 여성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될 것 같지만 결국에 돈 없는 다른 여성에게 맡겨 버리는 식으로 작동한다. 나는 이런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나부터 가사노동의 모든 부분을 몸에 새기려고 노력했다. 밥을 사 먹지 않고 요리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요리를 해 먹어 보았다. (지금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내가 직접 먹는 재료들과 친해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수십 년 간 해오는 일'이다. 엄마의 이 끝없는 가사노동의 굴레를 당신은 '남의 일'로 취급하고 결혼을 하면 '아내의 일'로 취급할 셈인가? 페미니즘으로 보는 가사노동에 대한 공부, 그리고 실천은 그 누구도 조명하지 않는 엄마의 노동에 대한 반성이자 나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익히기 위한 노력이었다.


야동=불법촬영 영상=강간문화

그리고 나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은 마침내 선명해져서 야동을 끊기로 결심한다. 성욕과 섹스에서 여성 혐오를 몰아내지 못하면 나의 페미니스트 정체성과 완전히 상반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7년 가을 쯤이었을 거다. 그리고 '한국사이버성폭력센터'의 활동이 점점 더 주목을 받을 받을 때였다. 성은 우리의 일상 중 하나고 터부시 해야 할 것이 아니라 터놓고 이야기해야 할 주제고 그 안의 여성혐오, 아니 이 사회에 만연한 강간문화를 인정하고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고민과 배움은 특정 책에 의존한 것은 아니었고 인터넷과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왔다.



자기혐오

2년간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도 온몸에 가득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 바로 '자기혐오'였다. 당장 여성혐오적인 말과 행동을 멈추는 일은 조금씩 실천에 옮길 수 있었지만 여태까지 살면서 나의 말과 행동은 어떤 방법으로도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그런 관계들, 나의 모든 생각, 말, 행동의 관성의 방향을 비틀어야 했다. (끝이 없음을 안다) 여전히 우울이 깊어질 때면 생물학적 성별 자체가 '원죄'일까? 고민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안다. 나도 구조 안의 개인이고 혼자서 모든 것을 바꾸지 못하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내가 이 구조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나는 차별과 혐오를 반대할 수 있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서 언젠가는 차별과 혐오를 몰아낼 수 있음을 안다. 우울에 빠진 나를 매번 구출해 주는 친구들에게 감사를 느낀다. 페미니즘은 책 읽고 생각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어느새 내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과 그 세밀한 차별, 혐오들을 언어화하고 권력이 가지고 있던 단어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새롭게 읽고 말하고 쓰는 일. 그것이 페미니즘 공부였다.


런던. Tate Modern

아직 망설이는 남성들에게

안전한 '남성성'을 유지해 온 남성이 공부를 하지 않고 페미니즘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의 답은 명확하다.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속해온 세계 자체가 다르고 경험 자체가 다른데 어떻게 새롭게 개념을 공부하지 않고 알 수 있을까? 거꾸로 이야기하면, 남성적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을 남성의 시선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는 과정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당신이 해왔던 여성혐오를 통한 다른 남성과 연대를 이루는 방법들. 그것들을 몽땅 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입을 막는다' 따위의 징징거림 말고 말을 못 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배울 생각을 해보자. 공부할 여력이 안되면 입을 막고 귀를 정말 열어보자. 그럼 느리게라도 여성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요즘은

요즘은 문학, 미디어, 드라마, 영화를 볼 때 어느 정도는 남성의 시선으로 쓰인 내용인지 아닌 지 느낌이 온다. 그리고 그 폭력적인 세계관은 아무리 재미난 이야기라도 유해하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남성중심적인 문화를 소비하기를 멈추기 시작했다. 이런 고민은 커져서 자본주의로 시작해 지금의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도구로써 작동하는 모든 구조들에 대해서 예민해지기 시작해졌다. 일상에서 활동하는 동아리부터 일하는 일터, 나아가서 커다란 국가라는 시스템까지 말이다. 그리고 재미나게도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해야지. 라는 강박에서 조금씩은 벗어나기 시작했다. 정체성과 이론이 내가 처한 실제 '현실'과 멀어지는 일을 경계하고 싶기 때문이다. 공부의 범위도 조금씩 확장되어서 사회학, 퀴어 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내가 처한 현실을 표현할 내 언어가 필요하다. 또, 큰 구조에 맞서서 지속 가능하게 내 언어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일은 단지 책 읽는 일만이 아닌 내가 마주하는 경험을 이해하고 또 성찰하고 다른 이의 고통을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지금이라도 공부를 하려는 분께

구글에 검색하면 수없이 많은 추천 도서들이 있다! 뭘 공부하든 자유! 정답이란 없다.

페미니즘 입문하기 : 이전에 써 놓은 글이 있어서 공유한다. 그냥 내 경험이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 일본에서 쓰인 책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소름돋게 우리나라도 같다.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 벨 훅스의 책을 모두 읽으려고 노력중이다.

책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 미투와 실존하는 성폭력을 위한 언어를 담고 있다.

넷플릭스 'Orange is the New black' : 말이 필요없음.

트위터, 페이스북의 수많은 네임드들과 페미니즘 정보 공유 계정들.

페이스북 페이지 Yangpa,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걸까?, 페미위키, 한국사이버성폭력센터, 닷페이스, 여성환경연대, 아는 페미


언제까지 페미니즘을 공부할 거냐고 공부해야 하냐고 물으면.

혐오와 차별이 없는 세상이 올 때까지라고 답하고 싶다.

항상 같이 고민해주는 친구들에게 사랑을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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