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나의 노력들을 많이 적었다. 사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성공하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아빠를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많은 부분을 더 내려놓고, 기대하는 것을 포기하면 나의 정신건강에 좋다. 실망도 없고, 답답함도 없으며, 좌절과 절망도 없다. 그냥 그러려니. 치매 진행 단계의 일부분이겠거니. 앞으로 펼쳐질 더 심한 상황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거니.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평정심이 들곤 한다. 한숨 푹 내쉬는 것이나, 아빠의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 도파민 터지는 유튜브 클립을 틀어놓고 보시라고 하고, 나는 때때로 취임새만 넣으며 휴대폰 게임에 열중하는 것도 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매번 평정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치매 노인을 돌보기에는 AI의 마인드가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같은 질문 세례, 같은 책망, 같은 좌절감에 대해서 전혀 흔들리지 않고 아무 일도 아닌 듯 친절함을 덕지덕지 묻힌(실제로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아빠와 나긋나긋이 대화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AI와 달리 1분마다 날아오는 100번이 넘는 같은 질문에 동일한 톤으로 나긋나긋하게 100번 넘게 대답해 줄 능력이 없다. 아무리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말해주어도 우울감과 망상에 빠져 자기 비하를 하는 아빠를 답답해하지 않을 넓은 마음이 없다. 심지어 현재로선 여러 가지 능력이 불완전한 AI는 내가 반박하면 곧바로 자신의 잘못이라 말하고 나의 구미에 맞는 답변을 내놓는다. 나는 항상 아빠의 구미에 맞는 대답만 할 수 있는 입과 혀를 가지지 못했다. 나에게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이 존재하고, 그 선을 넘게 되면 나도 언성이 높아지며 화와 짜증이 밀려와 심장이 쿵쾅쿵쾅 터져나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나의 한계선은 그때그때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때는 반복되는 질문들에 무던하게 계속 답해줄 수 있지만, 어떤 때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곤 한다. 대부분의 경우 아빠를 제외한 다른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많을 때에 한계선은 점점 더 가까워져 발 끝까지 닿을 듯 아슬아슬하다. 직장에서 몰아치는 업무로 몸과 마음이 모두 축 늘어져 있을 때나, 몸이 아파서 당장이라도 방문을 닫고 침대에 가서 실컷 잠이나 자고 싶은데 아빠 곁을 지키고 있어야 할 때나, 갑자기 몰아치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우울함으로 멍해질 때 나의 한계선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곁에 와있다. 아빠의 입장에서도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가시 돋친 반응이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과거의 기억이 없어 비교할 대상도 존재하지 않겠지만, 아빠는 내가 화를 낼 때면 대부분 왜 갑자기 그러냐고 의아해하곤 한다.)
또한 한계선이란 둑을 그냥 툭 깨트려버리는, 소위 꼭지를 돌게 만드는 상황 또한 존재한다. 나에겐 엄마에 대해서 아빠가 하는 말이 그러하다. 아빠는 자신의 아내의 존재를 자주 잊는다. 늘 나의 곁에 있어야 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은 아직까지 인지하고 있는 듯 하지만, 혼란의 상황이 닥칠 때면 본인은 결혼을 하지 않아서 결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끔은 엄마에 대해서 불신과 불만의 말을 내뱉곤 한다. 나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감정 컨트롤이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본인의 인생도 없이 하루 종일 아빠 곁에서 집안일을 하고 아빠를 돌보며 살아가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할 망정, 저 사람은 집에서 일해 주시는 분이라느니, 나에게 날카롭게 말하는 사람이라느니, 자신의 물건을 가져갔다느니, 왜 같이 사는지 모르겠다느니 말도 안 되는 엄마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내뱉을 때면 속에서 뜨거운 불이 솟구친다. 한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엄마를 그렇게 보호하려 하냐고. 오히려 그런 마음이 아빠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고 엄마에게도 더욱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고. 사실 그 조언이 의외로(?) 많은 도움이 되었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열쇠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도 나는 엄마가 안쓰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고, 그 곁에서 엄마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 대한 아빠의 말과 행동에 초연해질 수 없다.
한 달 정도 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마음속의 불길을 온몸으로 덮으며 아빠와 대화했지만 이미 내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했고, 나의 표정도 억지웃음으로 일그러져 아빠의 심기를 더욱 거스르게 했다. 나의 격앙되어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엄마는 나에게 내 방으로 가라고 하였고, 나는 엄마의 마음을 읽고 겨우 마음을 진정시켜 방으로 올라왔다. 방의 침대에 누워 멍하니 검게 비어있는 천장을 바라보는데 참고 참았던 눈물이 휘몰아쳤다. 혼잣말로 구시렁거리며 평소 때는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고, 가슴이 답답해 이따금씩 크게 한숨을 토해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뱉었다. 너무 슬프고, 괴롭고, 막막하고, 답답하고, 짜증이 나고, 분노가 차올랐다.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일 뿐이었다는 좌절에 고통스러웠다. 그 시간만큼은 아빠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잊혔다.
한 한 시간쯤 울었을까. 울음을 그치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검은 방 안에 정적만이 흘렀다. 나 혼자만의 공간. 그 속에서 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한차례 거치고 힘없이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쓰레기 같았던 감정이 눈물과 섞여 모두 빠져나온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휘몰아치던 감정의 잔재는 여전히 몸과 마음 곳곳에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빠에 대한 연민의 감정도 가벼워진 감정의 틈을 찾아 조용하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현실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실컷 울면서 거부하고 내던지고 싶던 현실이 축 늘어진 나의 몸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왔다. 신기하게도 그건 체념이란 느낌보다는 정화라는 개념에 가까웠다. 마치 내 마음속에서 호시탐탐 터질 기회를 노리고 있던 먹구름이 실컷 비를 뿌리며 천둥과 번개를 내려치고 나더니 결국 다시 해가 뜨는 상황과 비슷했다. 아직도 풀은 축축하고 곳곳에 쓰러진 나무도 보이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빼꼼히 개미가 땅 밖으로 나와 먹이를 찾을 준비를 하고 나무 그늘에서 몸을 피하다가 나온 새들도 햇살에 날개를 말리는 혼란 끝의 평온과 같은 느낌이었다.
치매환자를 간호하다 보면 나의 감정보다는 치매환자의 감정에 자신을 맞추게 된다. 나의 감정은 통제의 대상이 되고, 치매 환자의 감정변화에 더욱 예민해진다. 그러다 보면 나의 감정은 곪아서 썩어가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울면서 감정을 해소하는 시간이 참 중요하다고 느낀다. 오열하면서 내가 애써 외면했던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고, 터져 나온 감정의 빈자리에 곪아있던 상처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은 나의 마음도 토닥일 수 있게 된다. 이 것을 깨닫고 난 후, 이제 억지로 터져 나오는 울음까지 참지 않기로 했다. 매일 같이 신세한탄하면서 우는 것은 경계할 일이지만, 이렇게 한 번씩 시원하게 감정을 배출하는 것은 나의 마음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절차라는 생각이 든다.
평온함을 위해서는 가끔 이런 격렬함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