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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Mar 14. 2021

파스타 전문점

내가 알던 사람, P 이야기

 처음엔 그저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은 애인 줄로만 생각했다. 6학년, 초등학생 세상에선 최고 선배의 자리, 선생님을 제외한 모두가 나보다 아래에 있다고 여기기 쉬운 때에 나는 같은 반 친구로 P를 만났다. 굳이 친한 친구를 여럿 만들어 무리 지어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나와는 달리, 학기 초부터 P는 주변에 자기와 같이 다니는 친구들을 여럿 두었다.


 그 친구들이란, 급식차가 복도에 서있을 때 손잡고서 쭈르르 같이 줄 서주는 사람. 물론 제일 첫 번째 순서는 P여야만 했다. 가끔은 P가 뒤늦게 급식 줄을 서게 되면 얼마든지 자신 앞에 끼어줄 수 있는 넓은 마음도 가지고 있어야 했고. 쉬는 시간에는 서로의 자리에 찾아가 수다를 떨거나 선생님 몰래 자잘한 간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화장실엔 꼭 같이 가야 하고, 가끔은 같은 반의 다른 친구들, 심지어는 선생님의 험담을 몰래몰래 하고는 킬킬 웃곤 했다.


 5학년 때 유일하게 나와 친했던 친구 하나가 P의 무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나도 자연스레 그 'P의 친구들'에 속하게 됐다. 사실 P가 아니었어도 어쨌든 나는 누군가의 '친구들' 그룹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냥 그때 교실 분위기가 그랬다. 남자애들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여자애들은 한 두 사람을 중심으로 무리 지어 그룹이 학기 초반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 그룹을 중심으로 줄을 서고, 밥을 먹고, 화장실도 가고, 짝도 정하고, 과학실험 조도 정하고, 간식도 나눠먹고, 같이 험담도 하는 것이었다. 그게 초등학교 6학년의 사회생활이고 인간관계였으며, 그래야만 되는 줄 알았다. 아무도 직접 나에게 안 그래도 된다고, 괜찮다고 말해준 적 없었으므로.


 문제는 중간고사가 끝난 뒤부터 발생했다. 'P의 친구들'은 그래도 반에서 모범생 이야기를 듣는 친구들이 모인 무리였고, 반 일등인 친구도 있었다. 이등은 어떤 남자애, 그리고 삼등은 나였는데,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P의 불똥은 일등 친구에게로 튀었다.

 일등이 선생님 심부름 때문에 교무실에 간 사이, P는 나머지 친구들을 불러 모아 화장실에 갔다. 이런저런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가 P는 일등 친구가 본인 맘에 안 드는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걔는 매일 공부 얘기만 해서 재미없지 않냐는 얘기, 걔네 엄마가 사교육에 돈을 쏟아부어서 그걸로 걔가 일등을 하는 거라는 얘기, 걔네 엄마 치맛바람 덕에 선생님이 일등을 좋게 봐줬고 그래서 수행평가에서도 늘 좋은 점수를 받았을 것이란 얘기...

 P의 그 어떤 주장에도 타당한 근거는 없었고, 그럴듯한 의심과 추측만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P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화장실에 같이 못 오게 되는 다음 타자는 바로 나일 것이란 직감에, 나는 별 다른 반대 없이 그저 P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치고 나서야 친구들은 우르르 P를 따라서 교실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자, 일등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혼자서 줄을 서고, 밥을 먹고, 화장실도 가고, 교실에 남아 공부를 했다. 그런 모습마저도 P에겐 볼썽사나웠는지, 몇 번이고 화장실에서 일등의 재수 없음이 씹히곤 했다.


 여름방학에 모르는 사람이 나를 찾는 전화가 집으로 걸려왔다. 일등의 엄마였다. 할 말이 있으니 이번 주말에 옆동네 파스타 전문점에 나와달라고 했다. 나는 어리둥절하다가, 조금 무섭기도 하다가, 그래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음식점이라 들뜨기도 한 이상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갔다. 가보니 P를 뺀 나머지 'P의 친구들'과 일등,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상냥하고 세련된 말투를 사용하던 일등의 엄마는, 우리에게 먹고 싶은걸 마음대로 시키라고 하셨다. 나는 메뉴판을 펼쳐 낯선 이름의 음식들을 쭈욱 훑어보다가 적당한 가격과 익숙한 맛이 예상되는 토마토 치즈 오븐 스파게티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까지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무엇 때문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고, 우리들은 음식을 먹으며 일등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등과 앞으로 친하게 지내 달란 얘기였다. 초등학교 1-2학년 때나 들을 법한 말을 여기서 듣네,라고 생각하다가 이 자리를 마련하잔 생각은 일등에게서 먼저 나온 것일까 아님 그의 엄마의 생각이었을까 궁금해하기도 했다.

 

 나는 당연히 P는 이 파스타 전문점에서의 모임을 모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학을 해보니 'P의 친구들'은 화장실에서 돈으로 친구를 매수하려 한 일등과 그의 엄마를 욕하는 P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일등이 잘못한 걸까 생각했다.


 파스타 전문점에 다녀온 뒤로, P의 친구들이 아닌 일등의 친구가 되기로 한 애가 있었다. 일등은 더 이상 혼자 다니지 않았고, 두 세명 정도 모인 '일등의 친구들'이 생겼다.

 'P 친구들' 점점 화장실에서 모이는 횟수가 줄었고, 나도 가끔은  일이 있단 계로 화장실에 가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크게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알게 되었다. P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가끔 나는 P를 빼고 나머지 친구들과 만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 생각은 겨울이 끝나갈 무렵 현실화되었다.

 초등학교 졸업식날, 우연찮게 P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끼리 모여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들은 바로 약속을 잡았다. 새로 맞춘 교복을 입고서 중학교 개학식 전에 만나서 놀자고. 각자의 새 교복을 입고 와서 서로 구경도 하고 자랑도 하자는 얘기였다. 그리고 더 이상 P와 연루되지 않은 친구관계를 만들자는 암묵적인 합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쭈뼛거리며 각이 반듯하게 잡힌 중학교 교복 치마를 입고서 P와 일등을 뺀 나머지 친구들이 모여 맥도날드에 갔다. 우리들은 햄버거 세트를 몇 개 시켜놓고 깔깔거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주로 앞으로 가게 될 중학교에 대한 기대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소문들, 미지의 중학교 생활에 대한 들뜬 기분으로 범벅된 수다였다. 누구도 P나 일등에 대해서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저 우리들 중 누군가는 또 그 애들과 같은 중학교로 배정받았다는 사실만 눈치껏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 맥도날드에서의 만남도 P에게는 비밀로 부쳐져야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5학년 때부터 친했던 내 친구에게 어느 날 P의 엄마가 전화를 걸었다. P의 엄마와 대화를 하다가 실수로 우리의 맥도날드 만남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버렸다고, P가 분명히 알았을 텐데 우리에게 보복하면 어떡하냐던 친구의 염려와는 달리, P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P는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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