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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Jul 26. 2020

나는 그 때 왜 천 불의 사나이가 불편했나

IS도 코로나도 없던 시절의 여행 기록

지금 생각해보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와 어떤 계기로 잠시 여행을 같이 하게 됐는지. 그는 이스라엘에서 농장 생활을 3개월하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거쳐 터키로 여행을 왔다.(이 황금 루트 여행, 지금은 절대 불가능하다)  없는 돈에 아끼고 아껴 하는 여행이라 그의 경제적 관념은 여행 초보자가 보기에는 가히 경이로울 정도였다. 한국에서 출국 당시 천 불만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이스라엘 생활을 통해 돈을 모아 여행을 이어갔다. 그래선지 당시 1000불의 사나이로 불렸다. 혼자서도 거뜬히 세계를 누빌 수 있는 체력과 언어 실력을 겸비한, 나름의 여행 재원(?)이다.



문제는 천 불의 사나이의 식욕이다. 한 번 먹기 시작하면, 책상다리까지 먹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나도 덩달아 아끼게 된다. 식당을 가도 눈치가 보이고, 음료수 하나 고르는데도 분위기를 살펴봐야 한다. 나 혼자 먹다 보면, 뭔가 눈치가 이상하다. 본능적으로 침이 고인지만, 꽁꽁 숨기고 있는 그가 보인다. 가난은 감춘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데, 괜히  내가 다 신경이 쓰였다. 덩달아 나 역시 소금에 빵을 찍어 먹고, 초절약 모드 여행을 즐기게 됐다.



사실 나는 리조트식 여행이 체질상 맞지 않다. 당시 나는 캐리어가 아닌 배낭을 메고, 플랫 슈즈가 아닌 스포츠 샌들을 신고, 지도를 옆구리에 낀 채 카메라를 든 탐험가, 모험가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남들 다 가는 루트에서 놀다가, 갑자기 남들이 굳이 가지 않는 터키 동부로 뜬 것도 이런 심리가 있었다.




천 불의 사나이가 가장 아끼는 건 숙박비이다. 따라서 그는 트라브존에서 1박을 할 여유가 없었다. 아쉬움을 접고, 나는 얼른 동부로 넘어가자고 했다. 터키 동부는 쿠르드족들이 많이 밀집돼 있는 곳이다. 당시에도 치안이 불안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한 여행지였다.(지금은 아예 못 가는 곳) 하지만 물가는 훨씬 더 저렴하다. 동부 쪽으로 가면 천 불의 사나이도 좀 더 여유가 생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첫 차로 트라브존에 도착해 수멜라 수도원에 갔다. 비가 촉촉이 내렸고, 공기는 적당히 습했다. 산속에 위치한 수도원이라 가는 길 내내 등산하는 기분이었다. 숲 향기를 맡으며 걷는 기분도 좋았다. 내려와서 트라브존 시내를 구경했다. 시장에서 인도산 향을 구입했고, 향을 꽂는 향대도 샀다. 흑해가 펼쳐진 부산 시내를 거니는 기분이랄까. 제법 여유를 부리다 보니 트라브존이 좋아졌다.



얼른 티켓을 구입했다. 오토가르로 가서 여러 버스 회사 중에 익숙한 이름의 회사 창구로 간다. 지역명을 붙인 버스일 경우, 그 지역에 갈 때 이용하면 좋다. 예를 들어, 파묵칼레에 갈 때 파묵칼레 회사 버스를 타면 좋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적당한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고 싶다면, '메트로'회사를 권한다. 지금 이 회사가 존재할지는 모르겠지만. 광활한 아나톨리아 반도를 오고 가는 실필줄 같은 역할을 하는 버스이다.



그런데 천 불의 사나이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오후 7시 티켓을 끊어야 하는데 다음날 오전 7시 티켓으로 잘못 끊었다. 천 불의 사나이는 숙박을 할 수 없었다. 당황한 우리들은 오토가르를 방황하며 이후 행보를 고민했다.



"터미널에서 자자"



그는 결국 노숙을 택했다. 극한 여행을 자처했지만, 노숙은 생각지 못했다. 다행히 노숙을 하기엔 적당한 8월이었다. 흑해 연안 도시라서 적당히 서늘했다. 나는 배낭을 베고 긴 의자에 누웠다. 마치 이것이 배낭여행의 낭만인 것처럼.



터미널의 시간은 제법 빠르게 흘렀다. 한 할아버지가 오셔서 우리를 유심히 관찰하는 중이었는데 천 불의 사나이가 말동무를 해줬다. 어찌 됐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겠나 하는 심정으로 눈을 살짝 붙였다. 잠을 잤다는 의미는 아니다. 뒤척이다 코 고는 천 불의 사나이와 오토가르를 오가는 사람들 모습, 문 닫힌 창구들이 정물화처럼 하나의 풍경이 되어 내 기억 속으로 스며들었다.




당시 나는 천 불의 사나이에게 cdp를 빌려 음악을 들었다. 첫 해외여행이었던 나는 음악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mp3가 없었고, cdp는 무거워서 따로 챙기지 않았다. 음악 없는 여행을 떠난 나는, 여행 내내 음악이 그리웠다. 이어폰을 끼고 듣는 음악이 그리웠다. 마침 천 불의 사나이에게 cdp가 있었다. 이동하는 차 안, 노숙하는 순간, 나는 그의 cd 속 음악을 들었다. 나와는 전혀 취향이 맞지 않았지만, 다행히 딱 한 곡이 내 귀에 꽂혔다. 그 노래는 바로바로바로~~~ god의 '다시' 였다.




어쩜 내가 천 불의 사나이에게 필요했던 건, cdp 속 지오디 노래 '다시'와 그가 가지고 다니던 여행 가이드북 '지중해'가 아닐까. 터키 이후 이집트로 가야 했던 나는 가이드북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 이후 여행에 필요했던 정보들이 압축된 '지중해'(터키, 이집트, 요르단 여행 가이드북)를 어떻게든 내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는 집념으로 일정을 같이 한 건 아닐까.(흑심??)  물론 나는 가이드북을 얻었다. 나의 모자가 제물로 받쳐졌지만, 정보를 손에 넣었으니 이보다 든든할 수 없지 않은가.




이스탄불에서 다시 만난 친구와 언니가 나를 반겨줬다. 그들 역시 나를 반긴 건지 가이드북을 반긴 건지 모르겠다. ㅎㅎㅎ '지중해'를 득템하고, 우리는 무사히 이집트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언니 친구인 선교사 언니도 지난주에 가이드 했다던 아스완에 다시 왔지만, 시장통에서 매번 길을 잃었다. 결국 나는 나의 예민한 감각을 가동해 길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길치가 아닌 이유는 불안도가 높고, 뭔가에 홀리지 않고 순간순간 이정표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여행 중 믿을만한 건 나와 가이드북뿐이다. (물론 가이드북도 맹신하면 낭패본다) 우르르 몰려다니다 보면, 각자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결국을 지나온 길은 사라진다. 마치 나는 헨델의 마음으로 길에 돌을 던진 것이다.




천 불의 사나이는 이스탄불에서 6개월간의 여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한국에 돌아온 후, 그때 만난 다른 여행자 커플과 함께 한양대 앞에서 뒤풀이를 했다. 놀라운 건 북유럽에서 터키까지 3개월 가까이 함께했던 커플은 여행과 동시에 끝장이 났다. 끝장난 관계인데 이런 자리는 왜 만들었을까 내심 놀랐다. 둘은 시큰둥했고, 나는 좀 민망했다. 커플의 남자와 천 불의 사나이는 갑자기 호형호제하는 관계가 되었다. 둘이 킥킥대는 모습이 거슬렸다. 그 속내가 뭔지 다 보였기 때문이다.



여행 중 천 불의 사나이와 나는 로맨스가 없었고, 여행 비즈니스 관계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날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찌개를 시켜 밥을 먹는 그의 모습을 보고, 우리 관계도 여기까지가 끝임을 깨달았다. 그가 된장찌개 국물을 밥에 넣고 비빈 후, 숟가락으로 밥을 풀 때 밥그릇에 새겨진 줄무늬 자국까지 싫어졌다. 그 밥을 다 먹어치운 것도 거슬렸고, 빈 그릇에 새겨진 찌개 국물 자국들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유인즉 며칠간 같이 여행했다고 해서 나에 대해 잘 안다고 과신하는 그의 말 하나하나가 거슬렸다. 나의 신경은 곤두서기 시작했고, 점점 더 '어럽쇼' 이런 태도를 그를 바라봤다. 마치 그는 나와 사귀고 있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나를 잘 안다고 했던 그 태도가 거슬렸다.



그는 정말 나에 대해  몰랐다. 여행 중에 나의 아량은 세숫대야 냉면그릇만 하다면, 한국에서 나의 아량은 간장 종지보다 작다는 것을.   이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락을 끊었다. 블루 모스크 앞에서 마지막  같이 찍은 사진이 그와 내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디카가 없어 필름 한롤  롤을 계산해야 했던 시절, 쓸데없는 사진들을 많이 남기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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